김시민과 진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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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시민과 진주대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시민과 진주대첩
목차 -
Ⅰ. 머리말
Ⅱ. 김시민과 임진왜란
Ⅲ. 진주대첩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임진왜란의 수많은 전투 속에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3대 대첩’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이 그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임진왜란’또는‘3대 대첩’하면 이순신 장군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 다음으로 권율장군과 행주대첩이 이순신 장군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진주대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더러 보면서 다른 2명의 장군보다 김시민 장군의 활약상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했다.
진주대첩, 즉 진주성 전투는 1차전투와 2차전투로 나누어진다. 1차 진주성전투는 왜란 최초로 관군이 일본군을 완벽하게 물리친 진주대첩을 일컫는다. 2차 진주성전투는 패배했지만 의병들이 활약이 돋보인 전투였다. 이 글에서는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 즉 1차 진주성 싸움을 중심으로 김시민 장군의 일대기를 통해 임진왜란을 살펴보고 진주대첩의 전개와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김시민(金時敏)과 임진왜란(壬辰倭亂)
김시민은 명종 9년(1554) 충청도(忠淸道) 목천현(木川懸)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天安市)의 옛 이름이다.
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말 대몽항쟁 시기 무신이자 재상(宰相)이었던 김방경(金方慶)의 12대손으로 명문 사대부가의 자제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문과급제를 위해 유학공부에 매진하던 것과 달리 김시민은 무과에 관심이 많았다. 결국 그는 집안의 뜻과 달리 선조 11년(1578)에 무과에 급제하고 무관의 길을 걸었다. 김봉렬,「충무공 김시민의 생애와 정신」,『가라문화 제20권』,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2006, pp. 48~49.
선조 16년(1583) 2월에 여진족인 이탕개(尼蕩介) 이탕개는 선조 초 우리 나라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이다. 선조 16년(1583) 경원부(慶源府)에 사는 오랑캐들이 여러 가지 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해 난을 일으키자 반기를 들고 이에 호응해 난을 일으켰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탕개의 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315 , 2015. 5. 31.
가 함경도(咸鏡道)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그는 정언신(鄭彦信)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탕개의 난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李億祺) 등의 뛰어난 명장들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언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571 , 2015. 5. 31.
의 막하장수로 출정하였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장수들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이 때 군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백성들에게 불안함을 불러와 나라가 혼란스러워 진다며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분개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1591)에 김시민은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는 같은 해 2월에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의 귀국 보고 이후 일본의 조선침공에 대한 조정의 우려와 의구심 속의 조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김봉렬,「위 논문」, 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