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작가교육론] 균여론(畇如論) 협동학습 - Jigsaw학습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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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작가교육론] 균여론(畇如論) 협동학습 - Jigsaw학습방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균여론(畇如論)
협동학습 - Jigsaw학습방법
【균 여 론】
- 차 례 -
1. 균여
1) 생애와 가계
2) 시대적 배경
3) 저술
2. 균여전
1) 편찬과정 및 내용
2) 문학사적 의의
3. 균여의 향가 -보현보살십종원왕가(普賢菩薩十種願王歌)
1) 작품 창작의 이유
2) 향가 11수
3) 균여의 향가형식 ‘三句六名’
4) 평가와 의의
4. 균여가 사회에 미친 영향
5. 균여의 사상사적ㆍ문학사적 위치
- 들어가며
균여는 고려시대 불교사상가인 의천이나 지눌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불교사상가이다.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의 전제정치를 위한 광종의 개혁과 연관되어, 광종 개혁의 안내자와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향가를 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균여의 생애와 사상, 사상사적 위치와 문학사적 위치 등에 대해 알아보며 그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해 보자.
1. 균여(畇如)
1) 생애와 가계
균여에 대한 기록은 연대기 자료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혁련정이 쓴 『균여전』에 그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좌의 속성은 변(邊)씨이다. 휘(諱)는 균여이다. 부는 환성(煥性)인데 뜻을 고상하게 가져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다. 모는 점명인데, 일찍이 천우 14년(917년) 사월 초칠일에 한 쌍의 노란색 봉이 하늘로부터 자기의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천우 20년(923년)에 이르니 점명은 이미 나이 십육이었는데 임신(妊娠)을 하여, 21순(7개월)만인 이해 8월 8일에 균여를 황주 북쪽에 있는 형악에서 낳았다.]
이 기록만으로 균여의 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균여의 가계를 추측할 수는 있다. 그는 조부 이상의 가계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아, 가문의 신분이 높거나 지방의 대호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주의 변씨라는 성을 가진 것을 보아, 황주지역의 군속호족이었을 것이다.
균여는 속성이 변(邊)씨요, 이름은 균여이다. 아버지는 환성(煥性), 어머니는 점명(占命)이었다. 균여의 탄생에는 다음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전한다.
917년 4월 7일 밤 어머니 점명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쌍의 노랑빛 봉새가 하늘에서 내려와 품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 923년, 점명의 나이 이미 예순 살이었을 때 임신하여 같은 해 8월 8일에 7개월 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균여이다. 태어난 아이의 용모가 매우 추하므로 부모는 싫어한 나머지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그랬더니 난데없이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와 날개를 맞대고 아이의 몸을 엎어주는 것이었다. 행인이 이를 보고 부모에게 알리니, 부모는 그제서야 뉘우쳐 깨닫고 거두어서 길렀으나, 그 추한 모습만은 여전히 꺼렸다. 부모는 그를 상자 안에 넣어 두고 젖을 먹여 기르더니 두 서너달 뒤에야 동네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는 강보에 있을 때 이미 화엄경의 게(偈)를 잘 읽었고 아버지가 입으로 가르쳐 준 것을 열에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5살에 사촌형인 선균(善均)스님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에 가서 식현화상(識賢和尙)을 뵙고 그 밑에서 배웠다. 그러나 식현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낀 그는 식현이 잠드는 저녁을 틈타서 영통사(靈通寺)의 의순공(義順公)에게 가서 배우고 새벽에야 돌아와 식현을 공양하였다. 식현은 그의 뜻을 은근히 짐작하고 의순공에게 가서 배우도록 허락하였다. 균여는 그 밑에서 공부하는 동안 양식이 떨어져 7일 동안이나 먹지 못하는 일이 열 번 가량 있었으나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정종 4년(949), 균여는 스승 의순의 소개로 자신의 고향 황주의 대호족인 황보씨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사찰 승려들과 지반 호족들은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사찰은 호족들의 보호와 후원 속에 운영되었고, 호족들은 승려들로부터 대중을 이끄는 데 필요한 사상적 뒷받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보 가문과의 인연으로 광종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대목황후의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광종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균여가 본격적으로 국가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나던 해인 광종 4년(953)부터이다. 이때 후주 태조가 왕연 등을 파견하여 광종을 고려왕에 책봉하려 했으나, 계속된 장마로 인해 책왕의식을 치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조정에서는 기청제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때 기청제를 주관하게 된 균여가 강연을 하자 우레가 사라지고 풍운이 걷히면서 하늘이 맑아져 무사히 책왕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