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론 해환 - 문학적 생애, 작품 경향을 통한 작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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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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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환(海煥) 윤동주론
Ⅰ. 윤동주의 문학적 생애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金躍淵)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명동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1899년 바로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기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더불어 윤동주의 성장과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다. 명동교회의 장로로 도량이 넓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았다.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이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다. 아버지 윤영석은 자식들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는 이렇게 그의 아명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립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윤동주는 여기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고 웅변도 하고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 송몽규와 밤늦게까지 글을 쓰기도 했다.
1935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옮겼으며 거기서 문학에 대한 열정이 한껏 고조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초 한 대」(1934), 「삶과 죽음」(1934), 「내일은 없다」(1934) 등의 작품이 지어졌고,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제15호에 시「공상」이 게재되어 최초로 활자화되었다. 1935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된 후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학하는데 이 무렵 처음으로 북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주라는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빗자루」,「오줌싸개지도」,「무얼 먹고 사나」,「거짓부리」등의 동시를 대거 발표하였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르지 않고 고종인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文友)지에 「자화상」(1939), 「새로운 길」을 발표하였다. 이후「서시」(1941),「별헤는 밤」(1941),「또다른 고향」(1941)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씌어진다.
1939년에는 산문「달을 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하고 동요「산울림」을 조선일보 발행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1년 12월에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필사 본 시집 3권 중 1권을 그의 후배인 정병욱(전 서울대 교수)에게 주었는데 정병욱 소장의 필사본이 윤동주 사후인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집으로 발간되어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동경 릿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했다가,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했다. 이 시기의 「참회록」(1942), 「쉽게 씌어진 시」(1942) 등 다섯 편의 시가 그의 마지막 시가 된다. 1943년 7월 귀향의 길에 오르기 직전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이다. 발표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1936. 11), (1936. 12), (1937. 1), (1937. 3), (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 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특히 는 그의 대표 시로서,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 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