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온달 전감 상문

 1  감상문 온달 전감 상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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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전 감상문
온달전은 전반부의 서사가 서정적인 데 비해 후반부의 서사가 비교적 객관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공주가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온달의 집으로 와서 그를 뒷바라지해주기까지 이르는 전반부의 과정은 심지어 각 인물별로 대화에 대한 인용까지 있을 정도로 묘사가 자세하다, 그러나 온달이 사냥을 나가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공적을 차례차례 쌓아가는 부분부터는 묘사가 간결하며 역사적 사실만을 차례차례 나열한 것처럼 묘사되어 (온달전에 묘사된 역사적 사실은 허구가 많지만) 전반부와는 서사의 양상이 다르다. 심지어 온달이 신라와의 전쟁 중 사망하여 그의 시체를 관에 넣었을 때 공주가 하는 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뉘앙스의 말로 바뀌어 있다. 왕의 결정에 반발해 집을 뛰쳐나오는 행동을 보였던 사람이 하는 언행이라기에는 상당히 운명에 순응적인 대사다.
아마 고구려에서 실제로 전해지던 온달전은 공주가 국마를 사던 부분까지에 해당하고, 온달이 공적을 쌓기 시작하는 후반부의 부분은 상당 부분 유실되거나 변형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뉘앙스의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고려 시대 때 작성된 라는 점에서 이런 의심을 해볼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있다. 나는 온달전의 후반부가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전승되며 상당 부분 변형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중부 ~ 남부에 위치했던 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한반도 뿐 아니라 요동 지역에 이르기까지 꽤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통일 신라로 흘러들어왔던 고구려 지배층의 후예들은 일종의 좌절감을 지니고 있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고구려의 후손들을 위로하고, 또 사회적으로 불만을 품을 수 있는 여지를 막기 위해 온달전의 달관적 결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는 별개로 고구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 또한 있다. 고구려는 서옥제라고 하여 남녀가 결혼을 하면 사위가 일정 기간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를 통해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을 것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지 않았을 것임을 추론해볼 수 있는 근거가 온달전의 전반부 서사 속에 들어있다. 공주가 온달에게 병들고 파리한 국마를 사오라고 지시하는 장면이다. 고구려는 기마민족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말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였으며, 고구려의 문화유산 중 하나인 수렵도에는 말을 타며 사냥을 즐기는 모습이 묘사되어있을 정도로 그 국민들의 승마 기술이 뛰어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나라 또한 군사용 혹은 고급 교통수단으로써 국가 차원에서 말을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며, 비록 병들었다 해도 그런 관리를 받지 못한 민간의 말과 국가의 말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재밌게도 고주몽 설화에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게 빼어난 명마를 찾아 골라준 것도 그의 어머니인 유화였다는 점과 비교해볼 수 있다. 두 설화 모두 영웅적인 업적을 이룬 것은 남성이지만 그에 어울리는 말을 찾아내준 것은 여성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참고자료
http://classnet.hongik.ac.kr/~home/hbbs/del.php?table_id=135&msg_id=448&order=&cur_page=8&keyword=&search_o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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