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 정제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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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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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2. 조선 양명학의 발생과 전개과정
3. 하곡 정제두의 생애와 사상적 출발의 배경
4. 양명학의 사상
5. 정제두의 사상
6. 강화학파에 대하여
본문내용
1. 시대적 배경
하곡 정제두가 활동하였던 때는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극심하였던 시기였다. 연산군에서부터 시작되어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360여년간 지속된 당쟁은 조선조 전반에 걸쳐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현종시대부터 시작된 ‘예송(禮訟)’은 본격적인 당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효종이 승하한 후 그의 계모인 조대비의 상복문제로 인한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을 시작으로,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등을 거치면서 당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한 시대를 책임져야 했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곡은 당시의 정치 행태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정치 행태가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을 당시 정치인들의 사상적 뿌리인 성리학에서 찾았다.
하곡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이 현시적으로는 의리와 사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한계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의리와 심성을 이원화하는 성리학의 학문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하곡이 원했던 참된 삶의 모습은 올바른 가치관으로서의 의리와 이욕을 추구하는 개인적 욕심이 이율배반적으로 얽혀가는 거짓된 삶이 아니라 내 주체의 양심적 판단에 따라 진실되게 행동하는 가식과 허위가 없는 삶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지표로서의 의리와 이를 지키고 실천하는 주체로서의 심성이 하나가 되는 참된 학문의 모습이었다. 그가 양명학을 선택한 것은 곧 그가 원했던 참된 학문의 모습을 그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2. 조선 양명학의 발생과 전개과정
양명학의 동전(東傳)에 대하여, 1558년(명종 13)에 유성룡(柳成龍)이 17세 때, 의주(義州)로 돌아온 사은사 심통원(沈通源)이 압록강변에 버린 짐짝에서 양명집을 얻어 베껴 두었다고 했으므로 이해에 처음 양명학이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눌재집 訥齋集〉 연보(年譜)에 박상(朴祥)이 48세(1521)에 "왕양명의 전습록을 변론한다"고 한 것이 있고, 김세필(金世弼)도 〈십청헌집 十淸軒集〉에서 "양명 노선생이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성현(千古聖賢)이 서로 전수한 한 점의 골혈(骨血)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양명학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이 왕수인이 생존시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황(李滉)에게 불교적이라고 배척되었으며, 유희춘(柳希春)·유성룡·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에 의해 계속해서 배척받았다.
수용 초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남언경, 이요, 박세당, 윤휴, 장유, 최명길 등이 있는데, 그 중 최명길은 현실적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명분에 사로잡힌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적극적인 현실 인식과 실천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초창기의 호감과는 달리,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학문적 비판 비판의 내용은 대부분 양명학이 불교의 선종에 가깝기 때문에 유학의 정통을 이은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비판은 순수한 학문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과 임(壬)․병(丙) 양란이후의 당파싸움속에서 정치적 탄압으로 이
참고문헌
한국철학에세이, 김교빈, 동녘, 2003.
자료와 해설 : 한국의 철학사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2001.
하곡 정제두의 학문 세계와 생명사상, 송석준, 누리와 말씀 5, 인천가톨릭대학교, 1999.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동아일보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