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

 1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1
 2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2
 3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3
 4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4
 5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5
 6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6
 7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은상은 본관은 전주(全州). 필명은 남천(南川). 두우성(斗牛星). 호는 노산(鷺山)·강상유인(江上遊人)·노산학인(鷺山學人)이다.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출생하여,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청강하였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靑丘大學)·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영남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9년 충무공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 민족문화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 다년간 민족적 위인에 대한 현창사업을 전개하였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고 1966년 문화재 위원에 추대되었다. 1969년 한국산악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하고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74년 노산시조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해 한국·네팔 협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예술원 공로상, 5 ·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2년 1월 1일 운명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많은 시조가 있다. 저서로는 《노산사화집》 《노산시조집》 《노산시문집》 《이충무공 일대기》 《난중일기해의(亂中日記解義)》 《나의 인생관》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 일생을 통하여 시조(時調)와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두 길을 위해 진력하였다. 노산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양주동,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대 천재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노산이 처음으로 시험한 양장시조는 우리 시조 문학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고 주옥같은 시조와 산문으로 국문학계의 거봉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시조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 연구로 사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노산은 일생을 시조와 민족의식 양양운동의 두 길을 위해 진력하였다. 마산 사람들은 산호공원과 돝섬 정상, 무학산 아래 약수터에 『가고파』시비를 건립하였다. 이곳의 음악인들은 "노산 문학의 밤"을 해마다 열어 그를 추모한다고 전한다.
Ⅱ. 시적경향과 변모
이은상은 여러 월간지의 주필 혹은 편집책임자로서 1942년 해방을 3년 앞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생활도 잠시 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호남신문을 창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은상 선생이 일제 강점기시절인 1933년에 발표한 은 생동적이며 우리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민족주의적 시조집이었다. 이 시조집에서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려는데 무진 애를 썼다고 하며 또 한편의 작품인 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한 분노와 통일의 염원을 간절하게 표현한 이 작품집들을 통해 볼 때 그는 분명히 민족주의자였고 우리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그는 이승만의 시녀가 되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여러 직책의 감투를 쓰고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단편적인예로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에 그는 문인 유세단 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선거 지원 유세를 하였으며 특히 대구 유세에서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은 이순신 같은 사람이 나와야하며 바로 이승만이 그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연설을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승만 뿐이 아니고 이기붕까지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유당정권이 망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이번에는 박정희 정권을 찬양 하는 글들을 서슴없이 집필하였다. 그는 공화당 창당문을 작성했으며 문화 행정자문이 되어서 민족 문화협회장등 다양한 감투를 썼다.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그 비문을 작성하였으며 특히 박정희를 조상의 얼과 전통을 되살리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으로 발자국을 내딛게 한 민족의 탁월한 영도자로 서술하고 있다.
다시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전두환을 극찬하고 나선 이은상이었다. 이은상은 1980년 9월호 정경문화에서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는 글을 썼으며 내용을 보면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집필하여 전두환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국정 자문위원이 된다.
① 1932년의 면모
1932년의 은 1932년 4월 18일 발행이었다. 초판에 이허 중판을 함으로써 전대의 육당 에 이은 두 번째 선인 창작 시조집으로서의 큰 의의와 함께 당시 문단에서 큰 호응을 받은 시다운 작품이 많이 담겨 있다고 보여 진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