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전공에서 세종 바라보기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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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원래는 왕위를 물려받지 못해야 정상이나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행실이 바르지 않고 수성의 군주로는 충녕대군인 세종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태종에 의해 왕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 적장자 상속원칙에 따라 반대가 심했으나 택현론으로 이를 눌렀다. 택현론에 의하여 왕이 되었으니만큼 그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는데 이제 이 업적들이나 훌륭한 점 중 몇 가지를 전공과 관련시켜 알아보고자 한다. 일단 행정학이란 학문은 생긴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정의도 확실치 않다. 굳이 어거지로라도 정의를 내리려 든다면 정치와 경영의 혼합에 가까우니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세종을 바라보고자 한다.
1)정치적 측면
세종은 실리를 취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당시 조선은 명과 사대관계를 맺고 왕과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 ‘사대’ 라는 것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었으니 조선의 왕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왕 체면구기는 것, 실리라도 챙기자는 생각을 했겠고 이를 위해 툭하면 명에 공물을 바쳤다. 그런데 이 공물이라는 것이 소국의 대국에 대한 충성이나 성의를 나타내는 것이니 만큼 대국에서는 공물만 받은 후에 입을 씻을 수가 없고 기특하다면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물품을 주어야만 하는 것 이었다. 이렇게 공물을 자주 바쳐서 외국과의 무역적자를 메꿀 수 있었으니 사대외교가 아주 나쁜 것 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 중국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폭넓은 조사와 분석을 통해 오히려 중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요즘 공무원들이 욕먹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뭐든지 대충대충 성의없이 한다는 것인데 세종은 이를 없애기 위해 품질관리 경영을 했다. 세종정부는 그 전의 왕들에 비해 많은 프로젝트들은 전 방위적으로 수행하다보니 관리들이 그 많은 업무량에 대충대충 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그래서 세종은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했는데 당근은 철저한 성과주의 원칙이었다. 즉 자신이 일한 만큼의 보상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채찍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대충 했다는게 밝혀지거나 하면 아주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다. 이런 당근과 채찍전략이 잘 먹혀들어 세종정부는 많은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세종은 또 현장실무자를 중하게 여겼다. 업무의 전문성이 장기근무를 통한 노하우 체득과 연관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대신들을 그 직책에 장기근무하게 했다. 또 백성을 위한 통치의 성공여부는 하부구조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올바른 지방관리를 선발하고자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으며 직접 지방수령들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세종 때는 공신(功臣)이 한 명도 없었다. 공신이 없다는 것은 국가경영이 매우 안정되어있었고 나아가 간교한 책략 또한 발붙일 수 없었다는 얘기와도 같다. 공신이라는 것은 나라에 환란이 있어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로를 인정해 줄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시대에 이런 안정된 조정이 있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공정성과 도덕성 합리성에 근거한 인사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을 육성했다. 하지만 결코 성과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물은 중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조직 내 병목현상과 불화의 원인이 되는 것을 알고 세종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사람을 제대로 보고 쓸 줄 아는 왕이었다.
많은 군주나 총수들이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쫓겨나는 것인데 세종은 조정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가는 과정에서 기존세력들을 내쫓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뽑은 인재들을 그 아래에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권층의 불만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모든 자리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울 경우 역설적으로 이들을 견제할 집단이 없으므로 현명한 인사정책이었다고 본다.
세종은 취임 초에는 육조직계제를 실시해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을 낮추어 놓았으며 세종 18년 이후에는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함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을 높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은 겉모습뿐이었고 이 무렵부터 자신이 길러낸 집현전출신의 학사들에게 의정부 대신들을 견제하게 하여 실제로는 대신들의 권한을 축소해버렸다.
세종은 자주경영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드러나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간 중국으로부터 견제의 대상이 되어 사사건건 발목이 잡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를 위해 자주국방에 힘썼는데 화포 및 화약개발 등에 힘써서 백환화포, 세총통, 일발다전포, 신기전등을 개발했다. 또 해군력 증강을 위해 조선에도 힘써 일본 기술자를 초빙하기도 하고 외국 선박의 특징을 비교 연구하여 외국기술의 장점을 도입했다. 나중에는 잃어버린 땅들을 회복하기 위해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을 파병해 함길도와 평안도에 살던 여진족을 제압함으로써 4군과 6진을 설치케 했다.
세종은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는 방식을 취했다. 따라서 독단으로 흐르거나 아집을 부리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랐다. 세종과 신하사이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왕실을 높이고 시대명분에 융통성을 가지려는 왕과 자율성을 강조하고 명분에 충실하려는 신하사이의 의견차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서로간의 의견교환은 왕인 세종과 당시 세종정부에 참여했던 관리들이 원칙은 지키면서도 상호실리를 추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상호 의견교류와 절충은 세종정부의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2) 경영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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