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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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동조합주의 논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침체기. 노동운동은 현상적으로 조합원의 수가 줄어들고 쟁의건수도 감소한다. 또한 정권의 공세적 탄압과 더불어 선별적 파시즘적 통제와 더불어 온정주의적 통제가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노동운동의 외내부에서는 진보적 노자관계를 상정하고 코포라티즘의 한계를 뛰어넘어 내적지향성을 가진 ‘사회발전적 노동조합운동론’을 주장하는 진영과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자본과 정권의 물리적 탄얍과 이데올로기 공세를 산별노조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극복하여야 한다는 ‘전투적 노동조합운동론’이 서로 대칭을 이루며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게 된다.
1. 논쟁의 배경에 대하여
92년, 노동운동 내부에는 87년 폭발적으로 고양된 노동운동의 ‘대전환기’라고 말하는 ‘노동자 대투쟁’ 87년 노동자 대투쟁때에는 8월만 해도 해도 하루 400여건이 넘는 쟁의가 터지고, 20일에는 5하루 500여건, 29일에는 743건이 터졌다. 7,8,9월 총 3,337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며, 종업원 1천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75.5%에서 쟁의가 일어났다고 한다. 87년 6월 말에는 2,742개였던 노동조합이 89년말에는 7,861개로 늘어났으며 조합원 수도 1백만명에서 190만여명으로 두배에 가까이 증가했다. (민주노총, 노동운동사와 노동자의 삶 중에서)
을 통해 형성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안으로 제출된 것이 바로 코프라티즘에 기초한 ‘민주적 노자관계’, ‘진보적 노자관계’ 김형기, ‘진보적 노자관계’와 ‘진보적 노동조합주’를 위하여, 경제와 사회 통권 15호 92년 가을, 13면이하
, ‘유연적 노사관계론’ 이정택, 유연적 노사관계론 -민주적 계급타협의 현실적 대안-, 경제와 사회 통권 15호 92년 가을, 33면이하
, ‘계급타협주의’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임영일, 계급타협 혹은 계급타협주의와 노동운동, 경제와 사회 통권 15호 92년 가을, 56면 이하
,‘신조합주의’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박승희, 신조합주의의 현실성에 대하여, 경제와 사회 통권 15호 92년 가을, 75면 이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이다. 이미 ‘전노협’의 결성이후 내부의 노선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갈등은 예견된 것으로 보인다.(김진균)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결정적으로 수면 위로 본격화되어 논쟁화된 것은 87년 대통령 선거와 92년 총선에서의 노동운진영의 분열이후, 운동진영에 대한 현실적인 ‘위기론’을 일부 노동운동가 및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기하고 나서부터 이다. 그러나 이 논의를 통해서는 노동운동 내부에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출하지 못했고 남아공의 경우에는 1994년까지 결빙된 남아공의 권력구조가 94년 총선에서 ANC(아프리카민족회의)가 63%의 지지율로 흑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민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이후 제2세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거치고, 제3세대 COSATU(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가 NACTU(전국노동조합회의)를 조직적 주체로 하여 국민통일정부를 수립한 제1세대인 ANC(아프리카민족회의)와 삼자동맹을 통해 결과적으로 남아공의 노동조합운동이 전환된다. 이에 남아공은 노동조합 스스로 이러한 논쟁을 통해 노동조합 운동의 위험성과 노동조합의 전통과 목표 설정을 위해 ‘셉템버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큰 성과로 평가된다. (현장에서 미래를, 김영수, 1999)
, 이후 95년 ‘민주노총’의 결성 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이에 임금인상에 있어 한국노총과 경총을 앞세워 임금인상률을 14.7%~8.9%로 합의하게 하였고, 대법원 또한 노조대표자의 단체협약체결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직권조인의 합법성을 부여하는데 94년 또다시 이러한 김영삼 정권의 임금인상률 5~8.7%합의를 한국노총과 경총을 앞세워 함으로써 한국노총 맹비거부, 탈퇴운동이 대대적으로 이어지고 6월에는 전지협공동투쟁, 사무직노동자들의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그리고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면서 94년 11월 13일, 전노협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노총 준비위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라는 역사적 궤적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