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결성과 조직상의 특징特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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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결성과 조직상의 특징特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의 구한말과 1910년대 독립운동은 성격과 양상이 달랐다. 1910년대에도 구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계속되었던 것은 같은 점이지만, 국내와 국외에서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가 일어나고 있던 모습은 크게 달라진 점이다. 그 가운데에도 국내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 이에 대하여 그 개요와 조직상의 특징을 살펴 보겠다.
1.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개요
대한광복회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결성한 광복단(光復團)이 주축이 되어 같은 해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구성 인사는 의병 출신자 또는 의병 관계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서 박상진을 총사령관으로, 부사령에 이석대(李奭大) 이진룡(李鎭龍)을 선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6년부터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여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본부로 하고 곡물상, 여관,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상원양행(尙元洋行), 그리고 연해주에 연락처를 개척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는 그러한 연락처를 국내에만 100개소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구성인사를 보면 의병 관계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양한 인원이 참가하였고 혁신유림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므로 복벽주의을 이념으로 결속한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또한 박상진이관구의 경우와 같이 대종교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활동면에서는 세 단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습격을 통한 군자금을 모은다든가해서 구한말 의병 방식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두 번째는 전국적으로 100개소의 연락거점을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그것을 혁명의 거점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세 번째 방식을 택하였는데 바로 의열 투쟁의 방식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식민지 지주로 안주하면서 광복운동을 외면한 부호들을 처단하여 민족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이것이 1917년 말의 일이었다.
2. 조직상의 특징(特徵)과 의의(意義)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국내에서 의병과 성격을 달리하는 조직으로 새로 결성된 무장단체는 1913년의 풍기 광복단이 처음이었다. 풍기 광복단의 조직이 대한광복회로 발전되어 갔으므로 그것을 첫 번째의 특징으로 지적해 둔다. 두 번째로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유일의 전국적 조직의 독립군 단체였다. 전국 8도 가운데 함경도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으나, 그 밖의 지역에는 모두 지부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만주, 연해주에도 자부 결성을 추진하고 있어 국내의 동포사회를 망라한 거족적인 독립군 단체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국내에 100소의 혁명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식민시기에 31운동, 610만세 운동, 광주학생운동처럼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독립운동이 있기는 하나 조직적으로 혁명기지를 마련한 연후에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혁명적 독립운동을 계획한 독립군 전략은 대한광복회 외에는 없었다. 네 번째로 대한광복회는 공화주의를 표방한 독립혁명 단체였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조직인데도 특별히 이 기회에 임금이 없는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고, 이 이념은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면서 확신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로 대한광복회는 의열투쟁을 단체조직으로 단행한 효시가 되었다. 대한광복회와 의열단은 인맥으로 연결되어 그것이 방략의 연결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로 대한광복회는 구성인원을 볼 때, 위에서 지적한 조직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구성인원이 청장년이었다는 점, 구시대의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 혁신유림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 대 종교적 영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 등이 공화주의를 표방하게 된 인적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혁명전략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광복회(光復會) 업적에 대한 촌평문제(寸評問題)
식민지 법률은 그 법률이 적용될 사회의 정의와 양심과 통념을 배반하고 있었다. 배반한 것이 아니라 법을 적용할 사회의 정의와 양심과 통념을 탄압하고 파괴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연히 그 사회의 정의였고 민족과 인류의 양심이었다. 대한광복회의 업적 가운데도 식민지 권력과 야합하고 있는 조선인을 공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때 희생당한 이의 유족이 오늘날 효도의 명분으로 역설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효도라는 것은 그 사회의 정의와 양심과 통념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회정의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정으로서는 가정의 윤리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학문은 엄정하다는 것을 강조해 둔다.
4. 광복회(光復會)의 역사적 의의
대한광복회는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암흑기와도 같던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192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멸망한 후 적막강산으로 변한 이 땅에서 대한광복회가 출현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식민지 속에서 안주하고 있던 지주나 개량주의적 지식인은 철퇴를 맞은 것과 같은 느낌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민족적 용기도 크게 불러일으킨 대한광복회였다. 그와 같은 용기가 축적되어 이듬해 31 운동을 전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한광복회의 독립운동사적 위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유지는 31운동 후 의열단(義列團)운동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한광복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암흘했던 1910년대에 국내에서 큰 활동을 한 독립단체이다. 만일 대한광복회와 같은 선각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존재 할 수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광복회와 같은 선각자들이 있기에 지금 우린 희망찬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비록 현재는 분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민족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한 선각자들의 노력을 항시 상기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보다 건실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정확히 정리되지 않은 친일의 문제와 일제 잔재의 청산, 그리고 독립유공자의 위상정립문제를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어려움을 처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위기로 다가오느냐, 아니면 힘이 되느냐가 판가름 될 것이다. 지난 과거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재정립이야말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