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19세기 중반이전까지 동양삼국의 서양문화 태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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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학기술] 19세기 중반이전까지 동양삼국의 서양문화 태도 비교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기 전에
Ⅰ. 중국의 서양 문물 수용 태도
1) 명나라 말기
2) 17세기 이후
Ⅱ.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 태도
1) 도쿠가와 시대
2) 도쿠가와 막부의 멸망과 유신정부로의 정권이양
3) 메이지(明治)시대 (보충)
Ⅲ. 한국(조선)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 태도
1) 서양과학기술의 전래 초기
2) 대표적 실학자들을 통해 본 서양과학기술 수용태도
3) 실학자들을 통한 서양과학기술 도입의 한계
3) 신유사옥(辛酉邪獄)과 서학의 위축.
4)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 서양과학기술 수용
IV. 19세기 중반까지 동양삼국의 서양과학기술 전래의 차이 배경
본문내용
1) 도쿠가와 시대
1620, 30 년대에 도쿠가와 통치자들은 유럽인들이 막부 반대자들에게 막부의 통제 밖에 있는 군사 세력과 동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했고, 기독교 이념으로써 일본을 개방시켜 ‘타락’ 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기존의 일본의 대유럽 관계는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기독교는 심한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는 금압(禁壓)당했고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제재 조치가 취해졌다. 대외 무역도 곧 금지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나가사키항에 내항하는 중국 범선을 통해, 그리고 나가사키항 내에 설치된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통해, 데지마[出島]에서 소규모의 대외 무역을 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러한 결정과 더불어 쇄국(鎖國, 사코쿠)정책이 시작되었고, 쇄국 정책은 1854년까지 계속되었다. 무역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막부 관리들의 철저한 감독하에 있었다. 또한 막부는 외부세계와 일본의 접촉을 매우 제한시켰으며, 네델란드인과 중국인들이 제공하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정보도 통제하였다.
쇄국은 처음 100여년 정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 후 서양지식에 대한 적대감은 호기심이 의심을 압도하고 반기독교 감정도 시간이 지나 무디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검열이 결코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미술처럼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들이나 의학이나 작도법(作圖法)처럼 유용한 것들은 검열이 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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