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 대한 국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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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60~80년대 대한 국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60 ~ 70년대는 군사혁명 정부, 바로 박정희 정권시대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그 후 제3공화국 헌법에 따른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그의 정권을 합법화시켰다. 그의 임기는 1971년까지였으나 3선 개헌으로 1975년까지로 연장되었고4선 개헌이나 5선 개헌을 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연장될 수 없었다. 대통령을 더 할 수 있는 길은 제3공화국 헌정질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유신체제는 1972년 12월 27일 공식 출범하였다. 3선 개헌이 박정희의 향후 4년간의 정권연장을 보장한 것이었다면, 유신체제의 출범은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신체제는 1971년 12월 6일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 선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권위주의적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성립되었다. 유신헌법은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경쟁적 선거제도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전면 부정하였으며, 대통령의 권한 강화와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신헌법은 첫째, 국민주권 및 기본권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둘째, 입법부의 행정부에 대한 감시 및 견제 기능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셋째, 대통령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확대·강화되어 3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신헌법은 모든 정치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켜, 권력을 사인(私人)화시켰다. 동시에 국민의 참정권을 사실상 폐지하여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명백히 부인했다고 볼 수 있다.
1979년 10 · 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후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등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여 수립하였다. 이들은 12월 12일 군대를 동원하여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연행함으로써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2월 21일 최규하(崔圭夏)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실권은 신군부세력에게 있었다. 1980년 4월 사북(舍北)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12월 초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이 창당되었고,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980년대 제5공화국 역시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1980년대는 내부적으로 우여곡절의 진통이 극심했던 한 시대이다. 10 26에서 시작하여, 12 12, 5 17 광주민주항쟁, 4 13 호헌조치, 6월 항쟁, 6 29, 7 8 9월 노동자 대 투쟁 등에 정치적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1980년대는 공포정치 혹은 공안통치라 불릴 정도로 권위주의 군사 독재 정부의 강압적 탄압이 있었는가 하면, 이에 대한 저항과 사회민주화 운동이 가장 거세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이 정권은, 극심한 부정부패와 민주화 운동 탄압, 고문 등 인권유린행위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2) 교육현실(무한입시경쟁)
1960년대 당시의 국민학생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상당한 입시경쟁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중학교 입시경쟁은 오로지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것으로 어린 학생의 심신 발달 저하는 물론 교육 자체를 황폐화 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중학교 입시 경쟁은 사회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계기로 1969년 당시 교육혁명이라고 불리는 중학교 무시험제를 채택하여 중학교 평준화 정책을 단행하였다. 세칭 일류학교라고 불리는 중학교를 연차적으로 폐교하거나 학교명을 바꾸게 하였으며, 학교 신설과 교실을 신축하교 교원의 수를 증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중학생의 양적 증가는 고등학교 진학 경쟁의 원인이 되어 과열과외, 재수생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파생시켰다. 당시 인문계고등학교 지원자의 40%만이 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많은 중학생들이 속칭 ‘중3병’을 앓고 있었고 좋은 학교를 찾아 지방에서 서울로 해마다 1만 5000여명이 전입하는가 하면 거의 모든 중학생들이 과외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정부는 중학교의 심각한 입시 경쟁을 해결하기 위해 1973년 고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하여 고등학교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게 된다. 고등학교의 확대는 군사혁명 정부에서 발표했던 고등교육정원 통제로 인해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의 서막을 올리게 하였다. 사회적으로 대학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대학입시 경쟁의 가열화와 학벌 중심의 학력 체제가 강화된다. 고교 평준화로 인해 1970년대는 중등 교육의 확대와 고등 교육의 통제 정책으로 고등학생의 과외와 재수생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정치적 불안정을 무마하기 위해 교육 분야에 있어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한다. 당시의 교육 문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치맛바람, 암기식 교육, 과열과외, 재수생 문제 등은 교육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과열과외는 사회적으로 계층 간의 위화감과 불신감을 조성하고 학교교육의 정상화에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과열과외를 해소하고 전 국민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1980년 7월 30일 “교육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 발표문”이라는 명칭으로 이른바 7 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다. 7 30 교육개혁조치는 과열과외 해소뿐만 아니라 교육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려는 종합적 교육 개혁안이었다. 7 30 교육개혁조치는 고등 교육 정원을 일시에 30% 증원시킨다. 30%의 대학 정원은 상대 평가를 통해 중도에 서서히 탈락시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7 30 교육개혁조치는 본고사를 폐지하고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 성적으로 대학 입학자를 선발하고, 궁극적으로 예비고사까지 없애고 내신 성적으로만 대학 선발 인원을 가려내고자 하였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과외는 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금지시켰다. 그러나 7 30 교육개혁조치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7 30 교육개혁의 핵심인 졸업정원제가 7년 만에 폐지됐으며 과외 금지도 사실상 해제되어 거의 실패한 교육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7 30 교육개혁의 고등 교육 정원 30% 증가 정책은 고등 교육의 양적 팽창을 통해 원하는 대다수 사람의 고등 교육 욕구 열을 충족시켜 각종 사회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의 교육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수생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과외의 비율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을 뿐만 아니라 고액과외로 인한 과외비 지출 실태가 실로 엄청났다.
과외비 지출 실태를 보면 특A급 과외비는 80~150만원이 보통이며, 베테랑 급 학원 강사를 초빙해 가르치는 5과목 한달 과외비는 월 600만원을 지출하기도 하며, 예체능 계의 경우 레슨비까지 합치면 월 1000만원을 넘는 집도 있다. 유명 학원의 베테랑 급 강사는 한 달에1000만원~1500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중앙일보, 1989. 9. 22).
이와 같이 대학 진학 욕구가 강한 것은 학력이 사회적 이해관계를 구현하는 현실적인 지표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교육 자체가 매우 도구적인 욕구 특성은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왜곡시키는 교육 운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 고사의 교육목표는 진학 중심 교육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학생들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 교육운동이란
교육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사회적 삶을 위한 개인적, 사회적 발달을 꾀하는 사회적 현상의 하나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사회의 제반 변화 속에서 끊임없는 모순이 생기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운동을 하게 된다. 윌킨슨(Wilkinson)은 ‘운동이란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집단의 연속적인 행동과 노력으로서 인간관계의 변혁을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관(1989), 1980년대 교사의 교육운동에 대한 연구, 교육운동의 개념규정 및 이론적 배경 (중앙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김성열(1993), 19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 주도 교사들의 정책주장과 논리 구조, pp.9~38: 교육이론과 실천, Vol. 11 (1993)
김병욱(2002), 교사의 집단적 행동의 동인과 그 형성과정의 특성 분석, pp.63~80: 교육사회학연구, 제 12권 제 2호 (2002)
강창동(2002), 한국의 교육문화사, 문음사, 제5부 근ㆍ현대 교육문화의 전개와 특성
교육신문사(1999), 한국교육100년사 : 1880-1999, 교육신문사, v.1 교육사건편
전국교직원 노동조합(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서울:풀빛
정기평(1989), 80년대 후반 교육윤동사, 서울:형성사
심성보(1990),"한국교육운동약사", 한국교육연구소 편.
한국교육의 성격과 교직원 노조운동, 서울:푸른나무 p.141-157 &160-193
참교육 그 이해와 오해, 내일을 여는 책,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