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의 생애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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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피히테의 생애와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나무를 심는 건 십년지대계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했던 선조들의 생각처럼 교육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백년지대계란 백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라는 뜻으로 한 사회 또는 국가의 먼 장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므로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포함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육의 현실은 아침, 저녁으로 뒤바뀌며 시류에 야합하는 즉흥적이고 경제적 양상을 쫒는 계획들을 남발하고 있어 “위기”라는 표현을 쓸 만큼 다양한 문제들로 산재되어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칼을 댈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 국가가 전면적인 위기에 임하였을 때 교육을 총체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역사적 사례는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19세기 초 독일의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나폴레옹에 패배한 이후 독일의 프로이센은 불안한 상태에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교육개혁이 국가재건의 열쇠라고 보았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19세기 말기에 당시 서방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국운을 위협하고 있을 때 “갑오경장”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대개혁의 일환으로 교육의 전면적 개혁을 단행한바 있다. 수백 년의 교육제도인 성균관을 비롯한 학교제도를 폐지하고, 서양식 공교육제도를 수용하면서 국민개학을 목표로 한 새로운 학교제도를 발전시킨 것이 그것이다(이돈희, 2002). 현재 우리 사회는 피히테와 19세기 말기의 구한국 말기와 같은 전면적이고 심층적인 위기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교육현실 또한 보다 강력한 개혁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동감한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교육사상을 고찰함으로써 그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 보기 위해 먼저 피히테의 교육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생애와 활동, 인격적 특성을 고찰해보고, 그의 교육사상 정립에 기초가 되었던 실천적주관적윤리적 관념론에 기반을 둔 ‘국민교육론’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적 정리와 함께 피히테의 국민교육론이 독일 교육학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피히테의 교육사상을 통해서 위기에 처한 우리의 교육현실 극복을 위하여 각계각층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교육개혁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사의 역할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피히테의 생애
1. 성장기와 칸트와의 만남
1762년 독일 작센주의 한 작은 도시 람메나우에서 리본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774~80년 포르타 초등학교, 1780년 예나대학교, 1781~84년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가정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가정교사 자격으로 1788년 취리히에 갔으며, 1791년에는 바르샤바에 갔으나 2주 동안 견습만 마치고 떠났다. 이때 그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칸트의 철학에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하나의 획기적인 정신적 체험이 되어 사상가로서의 그의 평생의 활동 방향이, 칸트에 대한 연구, 특히 그의 도덕철학,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연구와 함께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참된 철학을 완성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피히테는 바르샤바를 떠나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를 직접 만나러 갔지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최초의 면담은 실망만 안겨 주었다. 나중에 피히테가 칸트에게 그의 논문 를 제출했을 때 칸트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칸트의 도움으로 논문이 출간되었다(1792). 초판에서 피히테의 이름과 서문을 우연히 빠뜨리게 되었는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재빨리 읽은 독자들은 칸트의 글이라고 여겼다. 칸트가 이 글을 추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자 피히테의 이름이 알려졌다.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를 강조한 예나 시기(1793~98)와 신비적·신학적 존재론이 나타난 베를린 시기(1799~1806)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시기는 철학적 기본 견해에서도 차이를 갖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이성을 능가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본래의 견해를 재빨리 바꾸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사상이 낭만주의로 발전하는 일반 추세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2. 예나대학 시절
1793년 예나대학 철학교수 자리가 공석이어서 피히테에게 그 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예나대학에서 5년간의 교수활동은 그의 생애의 외면적인 정점을 이룬다. 교수로서, 또 저술가로서 현저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래가지 않아 학생들과 동료들, 목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다. 그의 도덕적 요구가 너무 엄격하고, 정치적, 종교적 생각은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평탄하지 못한 교수시절에 많은 저서들을 발표하였다. 수준 높은 지적 문화의 중요성과 이러한 문화가 부과한 의무들에 관한 강의록인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가지 강의 Einige Vorlesungen u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1794), 피히테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정하고 가다듬은 지식학에 관한 여러 저작, 예컨대 〈지식론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 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6)와 의무 개념에 기초한 그의 도덕 철학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지식학의 원리에 의한 도덕론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nach den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8) 등이 있다.
참고문헌

연세대학교 교육철학연구회(1999). 위대한 교육사상가들Ⅲ 서울: 교학연구사, 363-399쪽
김창완(1995). “피히테와 헤르바르트의 교육개혁사상”. 교육철학, 제 13호. 한국교 육학회 교육철학연구회 편. 181-198쪽
정혜영(1998). “피히테의 독일 국민교육론”. 교육철학 제 20집(1998). 149-165쪽
이돈희(2002). 왜 교육개혁을 해야 하는가?. 경남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79-89쪽
김회용(2007). 좋은 교사의 자질. 교육철학 제38집 Vol.38. pp. 27-46
이현민(2008). 학교 교육 현실과 교사의 철학 교육철학 제 35집 121-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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