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교육과 역사의식 삼국시대의 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삼국시대의 교육은 봉건사회 교육의 일반성을 가졌다. 즉 정치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치인교육과 전쟁에 필요한 장수를 획득하는 군인교육을 실시하였고 서민교육은 하지 않았다. 치인교육은 인재를 만들어 치인계급을 조성하고 이 계급으로 하여금 위로는 군주를 섬기고 아래로는 서민을 가르치고 타이르고 억압하여 봉건질서를 확립하고 봉건제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장수의 획득을 중요시 했다. 삼국이 서로 침략과 방어를 하느라고 언제나 전쟁 중이었고 왜구와 중국이 상시 침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문보다는 무를 숭상하였고 일반국민에게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을 배양하는 동시에 장수 교육을 시행하였다.
※고구려의 경당
=>소수림왕 이후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기틀을 잡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 그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한편으로는 사찰의 계속적인 창립을 통한 부족 단위의 무속사상을 불교로 통합시켜 나갔다. 이러한 사상적 통일과 정치적 개편들은 군사조직의 개편과 정치적인 구조를 바꿀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성을 지방행정조직의 기본단위로 하고 있던 고구려는 지방행정조직이 곧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인 정복사업의 결과 늘어난 복속민을 종전처럼 귀족중심의 군사조직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귀족중심의 군사조직에서 지방평민도 참여하는 제도적인 개혁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평민참여의 군사조직과 함께 구성원들의 공동체의식을 고양하고 이 힘을 국가형성의식으로 고조시켜 정치적 통합력을 창출해 나가기 위해 촌락공동체의 결사였던 청소년집단을 교육시키기에 이른다. 이들의 교육장소가 바로 경당이다.
경당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간단하게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타나 있다.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여 형문시양의 집에 이르기까지 네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하고, 자제가 미혼에 주야로 여기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니 그 책으로는 5경과 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나 또 문선이 있어 이를 더욱 중히 여긴다.’ ‘궁리의 시가까지도 역시 서로 근면해서 길거리에 모두 엄옥을 지어 경당이라고 불렀다. 자제 중 미혼자는 거기에서 경을 외우고 활쏘기를 배웠다.’ 이와 같은 두 기록이 경당에 관한 자료의 전부이다. 이로 미루어, 경당은 지방 촌락에 있었던 문무일치의 사립학교 적인 교육기관이었고, 가난한 집안이나 평민층의 미혼자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교육내용은 문, 무의 학을 숭상하여 유교의 도덕윤리와 중국의 역사, 문학, 한자입문서, 그리고 활쏘기였던 것 같다. 이러한 교육내용의 구성은 중앙집권적 왕권통치체제를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 지방의 평민들에게까지 유교윤리를 심화 보급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고 또 평민의 군사참여 정책에 따라 평민에게까지 군사훈련을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따라서 활쏘기는 군사정책, 유교윤리를 가르친 것은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경당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한 목적과 제도를 알 수는 없지만 국가적인 학문의 보편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랑도
(1) 화랑도의 기원
=>[삼국지] {삼한전}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게 하고 천군 국읍 즉 몇 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진 소국의 정신적 종교적 지배자인 제사장.
이라 이름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어 소도 천군이 살고 있는 곳으로 죄를 범법자를 처형하는 대신 교화하고 생산노동에 참여시키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라 이름하고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을 달고 북을 치며 귀신을 섬긴다.”라고 하였다. 이 수두는 곧 신단이다.
신채호는 “화랑은 본래 상고 수두제단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낭의선인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예쁜 얼굴을 가진 화랑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최남선은 화랑을 ‘부루’ 교단이라 하였는데 “부루”는 상고 조선에 고유한 신앙인 태양숭배 곧 밝은뉘가 변한 말이요, 이 ‘부루’가 한자로 적을 적에 “풍류”라고 이름한데까지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화랑도는 상고시대부터 고유한 신앙 아래에 민족의 교양을 지도한 연원에서 생긴 것이다. 이 화랑은 원화, 국선, 선랑, 풍월도, 풍류도라는 많은 이름을 가졌었다. 신라 진흥왕 때에 조직화하여서 미녀 두 명의 원화를 두었다가 두 여자의 질투싸움으로 불상사가 생겨서 미남자를 세우니 이것이 화랑이다. 이 화랑을 중심으로 하여 좋은 남아들이 구름 모이듯 하고 그 모인 단체에서 각각 개인 인격을 수련시키며 거기서 인재를 고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1.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1997), 한국교육사, 교육과학사
2. 이만규(2010),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 살림터
3. 네이버 백과사전
4. 위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