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교육정책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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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18세기 정치·문화의 중흥기에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다수의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한편, 탁월한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여 문예부흥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개혁군주이자 계몽군주로서, 변혁기 통합의 정치를 이끈 리더십의 모델로서 지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조는 국왕이 된 이후 고위 문신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 까지 각계의 인재 양성과 선발에 진력하는데, 이를 통해 발탁된 인재들은 재위 중 정조가 주도하는 문물정비, 문예 부흥,사회개혁을 위한 경장 잘못된 관행이나 법, 제도를 바꾸어 그 혜택을 백성들에게 베푼다.
정책 등에서 활약하였다. ‘우문정치 학문을 우대하는 정치.
’ 실현에 적극적인 조력자로서, 정조 교육·교화정책의 또 다른 수행자로서 역할하며 오늘날 ‘조선의 르네상스기’, ‘조선왕조의 중흥기’ 라 칭송받는 ‘정조의 시대’를 이끌어냈다.
그러한 까닭에 정조는 조선시대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유가에서 이상적 정치가의 모델인 ‘군사(君師)’를 실현하였다고 평가받은 군주이기도 하다. 즉, 정조를 개혁적이고 노련한 정치가로서 평가받게 하는 일련의 경장정책의 배경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뛰어난 학자적 소양을 지닌 군주 정조가 있었다.
Ⅱ.정조 교육정책의 배경
1.정조의 정학론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학자군주로 손꼽히는 정조는 천성적인 학자적 기질을 바탕으로 평생 학문하기를 일상화하여 즐겼던 진정한 학인이었다. 정조의 학자적 면모는 그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서도 입증되는데 정조시대 편찬서적의 해제목록인 『군서표기』는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서로만 2천여 권이 넘는 양을 수록하고 있다. 그 양도 놀라운 것이지만 서적들의 질적 수준에 대해 당대의 신하가 유가의 이상인 삼대 성왕의 모습에 견줄만한 것으로 극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가 단순히 학문을 애호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서 감안해 보면, 사회질서 구축과 세도의 확립을 위한 통치책으로서 적극적인 인재양성책이나 서적 간행사업과 같은 학문·교육정책을 택했던 것은 학자군주 정조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정조 교육정책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정조의 천성적인 학자적 성향, 뛰어난 학문적 소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더불어 18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학자로서, 그리고 문치를 표방한 유교국가의 통치자로서 당대 학문풍토에 대해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정립한 ‘정학론’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정조의 교육정책은 궁극적으로 정학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여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라 평가되고 있는 정조 통치의 시대적 배경인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국학 성리학 연구가 정점에 도달하였던 시기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조선 문화의 독자적이며 개성적 전개를 주도한 진경문화가 형성된 조선 고유문화의 난숙기이자, 북학이나 서학과 같은 외래 학문이 유입되어 조선의 학계와 사상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던 혼란기였다. 청으로부터 고증학이라는 신학문과 더불어 인간감성을 자극하는 패관소품체의 문장이 도입되었으며 확대된 과학 지식들을 전해주는 서학이 전래되면서 여기에 몰두하는 학자, 문인들이 점차 늘어나는 반면, 이들이 중시해왔던 경학과 주자학은 점차 쇠퇴하는 조짐이 나타나 조선사회의 전통적 명분론 중심의 질서는 동요되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외래의 이질적 문화의 유입에 대해 청나라와 서구의 기물 같은 새로운 물질 문명에 대해서는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세도를 책임진 통치자의 입장에서 성리학적 통치 질서를 흔드는 이질적인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당시의 학문을 ‘위정벽사’의 관점에서 정학과 속학으로 구분하고 정학은 수호의 대상으로 속학은 배척의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속학의 만연으로 인한 폐단 가운데 문체의 변질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보았다. 이는 문풍을 세도와 밀접한 관계로 보는 그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정조는 문체란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문체를 바로 세우고서야 세도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치자의 입장에서 문체의 붕괴는 이념의 위기와도 같은 것으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통하여 정학에 근원을 둔 문장을 쓰도록 하였던 것은 단순히 변질된 문체를 바로잡고자 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도의 확립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V. 참고문헌
· 김문식(1996), 『조선후기 경학사상연구: 정조와 경기학인을 중심으로』, 서울 : 일조각.
· 정옥자 외(1999),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서울 : 돌베개.
· 정옥자(2001),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서울 : 효형출판.
· 최두진(2009), 정조대의 초계문신 교육제도 연구, 석사학위논문, 부산대학교 대학원.
· 안희연(2010), 정조의 교육정책 연구, 석사학위논문,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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