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요약 시청과 청취 WatchingandList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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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요-전통적인 미디어의 변화상을 짧게 고찰하고 있다. (전통적인 매체와 다른)새로운 저널리즘은 신문 지면에서 정치, 경제 영역 외에도 인간적인 관심을 끄는 요소와 사진의 사용 횟수를 늘렸다. 잡지의 경우 거의 모든 매체가 유명인의 라이프스타일 보도에 전념할 만큼 변화의 양상이 급격했다. TV 또한 뉴스가 모든 연령 그룹에서 시청률 하락을 기록했고, 멜로 드라마 같은 연예인 등 유명인의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에 관심이 쏠렸다.
신문 디지털화의 현재 추세로 인해 뉴스란 ‘만들어 내는 과정에 우리(소비자)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소비자가 내용에 대해 궁극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저널리스트는 청중의 이해가 그들 미디어 조직의 생존에 중요한 것처럼 그들 자신의 생존에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896년 2월 22일자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대본판(dummy edition)에는 Leander Starr Jameson의 사진 위에 제 1면 헤드라인으로 “시대의 인물(The Man of the Moment)”이 실렸다. 사진설명은 “신의 가호가 그대에게 있기를, 닥터 제임슨! 당신을 향한 조국의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제임슨은 ‘Dr. Jim’ 또는 ‘닥터’로 알려졌다. 보어 전쟁(Boer War, 영국이 네덜란드계 정부와 벌인 전쟁)에 앞서 터진 1895년 12월 제임슨 급습(Jameson Raid) 실패 후 악명을 얻은 인물이다. 제임슨은 보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약 6백 명의 개인 부대를 만들었다. 그의 계획은 요하네스버그를 급습해 네덜란드 출신 보어인(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 보다 두 배 많았던 영국 추방 노동자(uitlanders)들의 폭동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임슨과 그의 개인 군대는 결국 항복해야 했고 이 습격의 선동자들은 영국으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제임슨의 체포는 런던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어 정부와 크루거 대통령의 성공을 축하하는 독일 카이저의 전보가 언론에 노출됐고 이는 반-독일 감정을 일으켰다. 제임슨은 언론과 런던 사회에서 대우를 받았다. 1896년 2월 26일자 데일리 메일에는 4줄의 긴 헤드라인이 실렸다. “Dr. Jim / Bow-Street 법원의 이례적인 장면” / Cheer Upon Cheer / 위대한 재판 개정 상세 보도”. 이런 보도는 아주 이례적이었고, 여론에 대응하는 미디어 반응의 가장 빠른 예였다. 제임슨은 독일의 “위협”에 대한 해독제로 간주되었고, 급습 실패에도 불구하고, 진짜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유명세는 사생활에 대한 폭로보다는 그의 공적인 행동과 모습에 근거한 것이었다. 과거 이런 유명세는 특정 개인에게만 부여되었지만, 항상 일시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다 인터뷰가 합법적이고 인정 받는 저널리스트적인 형태가 되면서, 19세기 대부분 동안 저널리스트와 신문 소유자의 관심을 벗어났던 ‘개인들의 세계’가 문을 열었다. 20세기 후반이 되면서는 이런 ‘개인의 세계(private world)’가 현재 미디어에서 만연한 ‘유명인 문화(celebrity culture)’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내 의견을 들을 자격이 있다
새로운 저널리즘은 전통에 대한 공격이므로, 진지한 독자와 문화적 비평가 모두 ‘새로운’ 저널리즘을 싫어했다. 하지만 디스플레이 광고의 도래와 사진 사용 증가로 인해 영국의 Daily Mirror와 New York World 같은 신문의 내용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인간적 관심을 끄는 요소와 함께 이용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공간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 그리고 전문적인 저널리즘의 기반이었던 전통적인 남성 지향적 문제들이었다. Kevin Williams의 설명처럼 1차, 2차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Daily Mail과 Daily Mirror 등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제의 보도가 줄어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Daily Mirror가 공공 사회 문제 보도를 반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The Times와 같은 신문은 비교할만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저널리즘이 오로지 사회, 문화적 이해라기보다 계급(class)의 반영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인터뷰는 이런 계급 ‘투쟁(struggle)’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수직적으로는 모든 계급과 사회적 그룹화를 연구 가치가 있는 것으로 끌어들이고, 수평적으로는 인적 경험을 민주화하여, 정치, 법, 금융, 전쟁과 제국의 전통적인 남성의 경계를 넘어 이동했다. 이런 계급투쟁으로 인해 뉴스의 수집 프로세스도 확장됐다.
인터뷰가 특정한 유형의 인터뷰 대상자는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확실한 예가 ‘세기의 범죄’라 불렸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아들 납치살해 사건이었다. 린드버그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이 너무 커서 그와 그의 가족은 결국 유럽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종류의 미디어 관심은 대중의 반발로 이어졌다. 유명인들은 보도의 양보다 매체가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시도는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당신 등을 긁어주겠다”는 식의 간단한 거래인가, 또는 (인터뷰)결과에 대해 청중이 모르는 방식으로 채색하는 보다 더 많은 사악한 암거래인가?
유명인(이른바 ‘스타’)이 특정한 프로젝트에 연관될 경우, 미디어는 상업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유명인 뉴스와 재정적 목적 사이의 이러한 공모 관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스타 시스템의 초기 시절부터 시작됐다. 유명인과 연결되면 그 영화는 더 쉽게 팔릴 것이고, 개인적 삶의 ‘비정상성’을 감출 수 있는 필름이란 ‘매개체’를 갖고 있다면 그 유명인은 더 쉽게 팔릴 것이다. 예를 들어, 록 허드슨은 1950, 6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함께 계속 촬영하고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당시 동성애가 ‘박스 오피스의 독’으로 간주되었을 때 허드슨은 동성애자였다.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심지어 결혼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