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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58년 동경에서 열렸던 국제종교학회에서 말부르그의 프리드리히 하일러는 [종교통합 수단으로서의 종교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모든 종교의 통일을 위해 빛이 되는 것이 종교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 말하였다. 하일러는 종교학 연구에 종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서로 다른 종교전통 신봉자들간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종종 학문은 그 자체로 이미 정당화되는 것이며 ‘대화’ 따위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자체로 담은 범주들을 논의에 끌어들이는 것은 결국 엄정성과 올바른 자질의 상실을 불가피하게 초래할 것이라고 대답하는 데에서 당황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런 논의가 왜 있게 되었으며, 요즘 공격받고, 지지받는 입장들은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통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념 중 하나로, 종교학자는 그 본성상으로 상대적으로만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다. 즉, 종교학자는 종교의 상대성. 습합성을 신봉하므로 따라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종교학’이 종교간의 접근.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종교에 관한 여러 가지 태도 중에서도 특히 극도로 자유주의적인 어떤 성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종교학의 개조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틸레, 막스 뮐러, 프레이저, 샹뜨비 드 라쏘쌔이 등을 자유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종교의 기원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현재의 종교문제도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다. 특히 막스 뮐러는 종교간의 경계선에서 정개되는 정책과 논쟁, 그리고 1893년의 시카고 세계종교의회와 같은 행사에 기꺼이 관여하며 종교학이 순수과학일 뿐만 아니라 응용과학이기도 하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그런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1897년 스톡홀름 회의,1900년 파리 회의에서는 순수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는 시간이 갈수록 분열이 더 뚜렷해졌고 학자들의 분위기도 단계진화와 범세계적인 비교작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문화사,문화권,각 종교전통들의 독특성 등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측이 모두 ‘종교학’을 자처함으로써 학자들은 종교학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참여를 냉정하게 배제한 일종의 사학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고, 반면에 대화주의자들은 종교학도 어떤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대화주의자->시카고 회의의 노선은 일단 ‘유니테리언 등 자유주의 종교사상가 및 교역자 국제회의’로 이어졌는데 후에 이 아시아 회합들을 계획했던 야베츠 준더란트는 서로 다른 종교전통의 신자들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모든 보편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며, 모든 종교에서 ‘그들 모두가 세계의 도덕적 고양을 위해 함께 수행해야 할 큰 일이 있다는 신념’을 고취하고자 한다는 회의의 의도를 내세웠다. 이런 견해를 옹호하는 가장 특출한 이들 중 브라호마 사마즈의 창시자인 인도의 람모훈 로이는 1820년 [예수의 계명:평화와 행복으로 이끄는 지침]이란 저서를 출판하면서 모든 종교전통들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각자 나름의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신 관념에 상응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종교문제에 대해 다신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모든 종교의 평등을 표방하는 힌두교리에 선봉이 되었다.
라마크리쉬나는 정신적인 통찰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한 수단을 검토하면서 외관상 서로 상충되고 경합하는 여러 가지 종교적 견해들도 실상은 단 한 가지 실재에 대해 동일한 정신적 전망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베카난다는 모든 종교는 선하고 진실하며 또 최고의 지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고 하는 새로운 힌두교 정통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이 과정을 뒷받침한 것이 ‘신지학회’였다. 이 운동의 동양쪽 주체와 서양쪽 주체들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도 서로 회합을 가졌으나, 1차대전으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대단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이나 국제연맹 회원들의 낙관론자도 몇몇있었으며, 윌슨의 부임 초기에는 여러 가지 국제적인 운동들이 미국의 후원을 받아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1921년 ‘종교연맹’이 창설되어 루돌프 오토가 그 개회사를 맡았는데, 그는 도덕과 종교의 원칙들을 부정하는 전세계적인 풍조와 맞서 싸우는 데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며, 하나의 세계적 신앙을 원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각 전통들의 대표자들이 ‘유물주의’나 ‘세속주의’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공통의 적에 대처하여 한데 모일 수 있는 세계적인 광장을 원했던 것이다.
종교학의 관심사를 곧 세계평화, 국제적인 조화, 세계의 형제애로 본 이들 가운데서 특히 영향력 있는 위치에 점했던 인물이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쉬난이다. 그는 종교학도는 “절대 이격과 공정의 정신으로 모든 종교를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공정성이란 자신의 배타적인 주장을 버리게 하는 것, 즉 어떤 특별한 종교철학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종교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은퇴할 무렵 중요한 활동 중 한 가지는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센터 창설 기념 강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강연은 1961년 [정신의 동료]라는 제하에 출판되어 1966년, [철학,종교,미래의 세계문화]에 다시 게재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인류에의 신앙과 인간에 대한 비관론, 종교 연구와 실천이 그 실현에 기여할 좀더 나은 것에의 기대, 또 종교연구가 가져 올 상호이해에 대한 확신 등을 재언명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 보면,1930년대에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세계신앙동지 국제회의’, ‘세계신앙회의’ 등 종교간의 회합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동들은 어떤 면에서 단순히 새로운 이신론운동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신비주의전통, 그 중에서도 특히 신힌두교의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구호대로 이 운동은 ‘영구한 철학’을 지향했다. 이를 지지한 학파에서 가장 널리 읽힌 헌장은 알도스 헉슬리의 [영구한 철학]이었다. 한편 이에 반대한 이들 가운데서는 라다크리쉬난의 후임으로 옥스퍼드 대학 ‘동양 종교 및 윤리’과목의 스팰딩 교수로 부임한 체너가 특히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영구한 철학’이라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유태교와 조로아스터교로 대표되는 예언적인 종교는 ‘영구한 철학’이라는 총괄적인 개념에 포괄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에 입각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종교학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종교인들간의 상호 이해증진일 수는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종교학이 나아가 여러 신앙들의 단편들을 모아 어떤 종합종교를 만든다거나 또는 모든 길이 하나의 동일한 목적지로 이르는 듯 매도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교학’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데에서 야기될 수 있는 혼란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다. 그처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용어가 더 이상 아무 유용성이 없다고 보는 것은 논쟁의 여지를 담고 있는 얘기이다. 사실상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 온 각종 충동들로부터 야기된 방법론의 불확실성을 배경으로 해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제 최근 20여년 사이에 제기된 몇몇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고찰함으로써 결론을 맺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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