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공에서 바라본 세종시대와 그 정치의 이해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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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기 전공에서 바라본 세종시대와 그 정치의 이해 경영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통계적인 의사(意思) 아래에서 일정한 계속적 시설을 기초로 하여 활동하는 조직체의 구조와 행동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경영학에는 이 정의에 해당하는 조직체 일반(기업 ·관청 ·학교 ·교회 ·노동조합 ·군대 등)을 연구하는 넓은 의미의 경영학, 즉 일반경영학과 기업(企業)이라는 특정조직체인 생산조직체만을 연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영학, 즉 기업경영학이 있다. 일반경영학에는 각종 개별조직체를 따로따로 연구하는 특수경영학이 포함되며, 최종 과제는 모든 조직체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일반원리를 형성하는 데 있다.
국가 경영과 기업 경영의 차이점
경영은 근대이후 재화와 서비스 생산의 주체인 기업에 주로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오늘날에는 가정, 기업, 국가, 기타 공동체 모두 본질적으로 경영을 내포하고 있다. 알다시피 기업의 역할은 원자재, 에너지, 자본, 노동 등의 투입물을 사용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어 팔고 그 대가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다. 기업에서의 경영은 지속적인 이윤창출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해 기업이 하는 모든 활동을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의 경우에는 목적과 역할이 다르다. 국가의 존재목적이나 역할은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인 영역(영토) 내의 모든 국민과 재산을 보호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치안, 외교가 기본이고, 또한 경제활동의 촉진제이자 여러 경제 주체 간 이해조정자, 환경, 교육, 보건 등 국민의 복지향상자 등이 된다. 국가경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역할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경영은 역할범위가 다양하고 폭넓으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해조정이 어려우며, 다른 나라와의 외교나 치안까지 포함되므로 기업경영에 비해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업경영의 경우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기업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이 전개되도록 전략, 인프라/시스템, 인적/조직관리, 자금조달 및 관리, 리더십 등의 여러 노력/활동들이 최고수준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추구되어야 하고, 특히 CEO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임직원들이 능력과 재능을 겸비하면서도 동시에 주인의식을 갖고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어야 그 기업이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 국가경영도 입법, 사법, 행정의 여러 의사결정자들이 최고경영자 즉 CEO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기업처럼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상호 대립되는 관점과 의견을 가진 정치집단간의 이해조정이 불가능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더 어렵고, 방대한 관료조직(공무원 조직)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게 하기에는 목적의식도 불분명하고 권위주의적인 조직관리 때문에 동기부여의 한계가 있는 등 기업만큼 효율성, 효과성을 제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종대왕은 누구인가
태종이나 충녕대군(세종)이 서로 잘 아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국가 CEO자리는 적장자가 승계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창업 이념에 비추어 볼 때 쉽게 간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매우 중요한 대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만일 이러한 원칙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조선의 사상적 기반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충녕은 누가 봐도 서열상 CEO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녕은 끊임없이 자기 연마와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태종처럼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치부심, 와신상담한 끝에 CEO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국가 CEO가 될 수없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녕은 끊임없이 자기 준비를 해나갔다. 언제 쓸지, 과연 쓰일 수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충녕은 그와 같은 준비 과정을 자기 수양의 방식으로 택했다. 그것은 그의 삶이 택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충녕의 능력을 알아본 뛰어난 혜안의 소유자인 태종에 의해 발탁된 것이었다. 태종은 결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칼 위에 역사를 세웠다 할지라도, 그 또한 분명 국가를 경영해본 사람이었다. 그만큼 사람의 가치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이처럼 무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태종이 자신과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인 삼자 충녕을 차기 CEO로 지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파격적인 결정이자, 인재 발탁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충녕은 차기 CEO 후보자로 생각될 수조차 없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