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사회복지 발달사 영국 의사회 복지 발달사의 시작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의 근대적인 사회복지 역사는 1601년의 엘리자베스 구빈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1601년 이전의 구빈법의 시작과 성립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영국의 사회복지 발달사에 대해서 시대별로 알아보자.
영국의 사회복지가 시작된 것은 종교 단체의 자선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때의 자선사업은 자선적이고 수혜적인 성격이 강했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의 진행으로 초기 사회복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자선사업이 가장 활발해진 계기는 산업혁명과 종교계혁 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봉건제도가 붕괴되었으며 새로운 계급인 노동자와 자본가가 등장하였다. 그 결과로 농촌의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는 경작지를 목유지로 변화시키는 엔클로저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농노들이 유랑민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었다. 더불어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산되어 그나마 수용되었던 피 보호계층 들이 부랑인으로 전락하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영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복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영국은 사회복지국가 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348년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해 영국 전체 인구의 2/3이 사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력 부족과 임금이 상승하게 되었다. 그 결과 1349년 영주들의 요청에 의해서 에드워드 3세가 노동자법 을 제정. 발표하게 된다. 이 노동법의 목적은 부랑 생활과 구걸행위를 예방하며 농촌 노동자들의 도주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그 내용으로는 ①고용주의 고용제의를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는 노동자는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②현 거주지에서 이사할 수 없고, ③걸인들에게 돈을 주는 등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법을 어길 시에는 감금, 채찍, 낙인 등의 극악한 형벌을 가했다. 이 법은 세속적인 국가권력이 교회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학설에 영향을 끼친 법 중 최초의 법이었으며, 양모산업의 확장으로 인해 경작농토가 초원으로 바뀌게 되는 상황을 낳았다.
그 후 1531년이 되어 헨리8세가 빈민구호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였고, 1536년 에 최초로 공공구호계획을 세웠으며, 1562년 장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노동자에 대한 임금과 노동시간을 규정하였으나 자발적인 모금은 빈곤을 돕는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 이 사실로 인해 1563년 의회는 강제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재산과 소득에 기초한 일정액을 주당 기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책으로도 부족한 면이 많이 보이자 1572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반세 제도를 도입하고 교구의 빈민관 제도를 도입하여 정부가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1576년에 교정원에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어 일을 할 수 있게 하였고, 1597년 교구위원들과 4명의 사회 유지민들을 빈민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구빈원을 설립하는데, 이 기구는 무능력 빈곤자, 노인 등의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한 기구이다. 이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빈민법(1601년)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기간 동안 제정된 빈민법을 지칭하는데 그 중에서도 1598년부터 검토되어 1601년에 제정된 법을 지칭한다. 즉, 1601년에 생겨난 법은 엘리자베스 빈민법 중 대표적인 입법이다. 이 법은 영국의 사회복지에 있어서 빈민구제에 가장 기본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은 교정원이나 강제노역장(작업장)에 수용되어 강제 노동을 시켰으며 교정원에서 노역하기를 거부하는 걸인이나 부랑자는 감옥에 투옥시켰다. 노동능력이 없는 빈민의 경우, 법정 자격의 범위 내에서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구빈원에 수용되었다. 만약 노동 능력이 없는 빉민들이 거주할 집을 가지게 되거나 그들의 집에서 그들을 원조하는 것이 더욱 싼 비용이라고 예상될 경우, 빈민 감독관은 현물(식량, 의복, 연료)을 공급함으로써 원외 구조를 실시하였다. 고아, 기아 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부모가 너무 빈곤하여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동들은 보호하기를 원하는 시민에게 위탁시켰다. 8세 이상의 아동은 도시민에게 맡겨져 도제생활을 하게 하였고, 소년들의 경우 24세가 될 때까지 보모의 상거래 활동을 배웠고, 소녀들은 가정부로 맡겨지거나 21세 혹은 결혼할 때까지 도제로서 생활 하였다.
정주법 (1662년)
정주법은 교구민과 상류귀족사회 양측의 압력에 따라 찰스 2세가 제정하였다. 1662년 빈민 감독관의 의견에 따라 치안판사가 장차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부담되어 질것으로 생각되는 새로운 이주자들을 이전 거주지로 돌려보내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법이다. 지역의 산업발전이 이주자들에게 커다란 꿈을 약속하는 것이었지만 봉건제도가 붕괴된 이후에도 농촌지도자들을 그 마을에 묶어 두려고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빈곤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방랑인, 미혼모까지 강제 추방하고 어느 교구에서는 빈민 감독관들이 걸인들을 일소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는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작업장 테스트법 (1722년)
이 법의 목적은 빈곤의 이유를 엄격하게 조사하여 노동이 가능한 빈민은 국가에서 고용함으로써 국가적 부의 증대를 도모하기 위해서 제정했다. 작업장을 단일 교구 단위나 인접한 교구들 간의 연합에 의해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구빈신청을 억제함으로써 구빈세 부담을 줄여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법으로 국가가 관리하기 힘든 빈민들에 대해서는 민간인에 보호를 청부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줄이려 했다. 이전의 구빈법이 빈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성격이었다면 이 작업장 제도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로 빈민을 노동자로 만들려 하는 노동지향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초기 얼마간은 구빈세 절감의 효과를 보였으나, 차츰 작업장 운영의 부적절성 및 비경제성문제가 불거지면서 오히려 후에는 비용부담을 더욱 늘리게 되었다.
길버트법 (1782년)
이 법은 작업장에서의 빈민의 비참한 생활과 착취를 개선할 목적을 가지고 1782년 하원의원 길버트가 제안하여 통과시킨 법안이다. 교구 연합방식의 채택을 통하여 구빈행정을 좀 더 합리화 하고자 시도하였다. 교구연합은 공동으로 작업장을 설립할 수 있는데, 이 작업장은 노인, 질환자, 신체허약자 등만을 구제 대상자로 삼았다. 노동능력이 있는 구제 빈민들은 고용주 등에게 임금보조 수당을 지원하여 고용하게 함으로써 최저생계비 수준의 급료를 지급하게 하였고,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에 대한 시설 외 구호의 적용과 노동자의 저임금을 보충해주는 임 금보조제도의 법적 기초가 되었다. 이 법은 작업장 중심의 공적 원조체제로부터의 최초의 일탈이며 시설 외 구호계획의 전환점이 되었다. 구빈행정의 합리화와 빈민처우의 개선을 목적으로 구빈법의 전통을 탈피하여 구빈행정의 억압적 성격을 완화시키고, 시설 외 구제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일종의 실험 이라고 볼 수 있었으며 법 실행의 여부는 각 교구의 자유재량에 맡겨졌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오늘날 거택 구호제도의 효시가 되었고 이법의 시행과정에서 최초로 근대적의미의 고용, 실업 대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