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

 1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1
 2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2
 3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3
 4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4
 5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5
 6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6
 7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7
 8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번 과제를 준비하기위해 고전 여성작가 누구를 선택해야할까 고민이 많았다. 누구나 한번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작가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세상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선택해서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여성작가들을 찾아보면서 임윤지당을 선택하게 되었다. 윤지당은 다른 고전 여류작가들이 문학적 성격을 가진 저술들을 남긴 것과는 다르게 그의 문집인 ‘윤지당 유고’는 대부분 형이상항적 철학과 역사를 연구한 논문들로 채워져 있다. 그의 문집에서 보이는 학문적 수준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에게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받고 있다. 윤지당이라는 인물을 이번기회로 인해 처음 접했지만 그는 대단한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당 시대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연구하여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조선조의 최초의 여성 성리학자인 임윤지당의 생애와 그의 사상등을 조사하여 어떻게 이러한 학문적인 업적을 쌓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학문적업적과 그 위상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보았다.
임윤지당의 생애
임윤지당의 생애와 학문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문적 전통과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녀의 고조부는 효종 때 도승지, 형조참판, 평안감사 등을 지낸 금시당 임의백(1605~1667)이다. 그는 효종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고 깨끗한 인품으로 사대부 사회에서 덕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는 예학으로 유명한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송시열, 송준길과 교유가 깊었다. 임윤지당의 고조 할머니는 정부인 상산 김씨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상의 딸이었다. 윤지당의 아버지 노은 임적(1685~1728)은 26세에 소과에 급제, 벼슬을 하다가 당쟁이 치열해지자 그만 두고 충청도 청풍현의 노은 골짜기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 근처 황강에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권상하가 살아서 그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학문을 그만 두고 다시 과거에 몇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음직으로 벼슬을 했다. 그러나 함흥판관으로 임명된 1725년(41세)에 버릇이 좋지 않았던 기생을 매질한 혐의로 탄핵받아 관직을 버렸다. 이후에는 청주의 옥화로 낙향하려다 병으로 숨졌다. 그의 어머니 파평 윤씨는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의 딸이었다. 윤부는 소론의 영수 윤증의 6촌 동생이며 이조판서 윤동섬의 할아버지이다.
윤지당의 형제 자매는 모두 5남 2녀였다. 큰 오빠 임명주(1705~1757)은 일찍이 학행으로 추천되어 명릉참봉, 동빙고 별검, 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1747년 뒤늦게 문과에 합격하여 한성참군,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소론 중심의 탕평 정치를 강력히 비판, 영조와 정면 대결하여 제주도로 귀향을 갔다. 1750년 귀향에서 풀린 후에도 7년간 금고되어 있다가 중풍으로 전주에서 죽었다. 둘째 오빠 임성주(1711~1788)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독창적 유기설의 주창자였다. 그는 윤지당보다 10년 연상으로 1711년 부친이 청풍 노은에 은거할 때 태어나 1733년 소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뜻하지 않아 도암 이재의 제자로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들인 역천 송명흠, 한정당 송문흠 형제와 미호 김원행 등과 교유, 학문을 강마하고 수행에 정진하였다. 임성주는 젊어서부터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자 1750년 세자익위사 세마에 추천되어 사도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782년 72세의 임성주는 누이인 윤지당과 가까이서 살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원주의 산호로 와서 윤지당과 5년을 살고 1786년 다시 녹문으로 들어가 2년 후인 1788년에 죽었다. 셋째 오빠 임경주(1718~1745)는 비상한 재능과 인품을 타고났으나 28세의 젊은 나이로 형제 중에서 제일 먼저 죽었다. 특히 문장에 재능이 있어 많은 글을 지었다. 문집인 『청천자집』이 전하고 있다. 윤지당의 바로 아래 동생인 임병주(1724~1756)는 깨끗한 인품과 비범한 재능으로 공자의 제자인 안회를 닮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몰두하였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임성주의 임지였던 임실 관아에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막내 동생 임정주(1727~1796)는 형인 임성주의 학설을 이어받아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윤지당보다 여섯 살 아래였는데 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762년 소과에 합격, 1722년 동문교관, 익위사 시직 등을 거쳐 시연관으로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학문을 지도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홍국영에 의해 밀려났으나 후에 송화 현감, 사옹원 주부, 온릉령 청산 현감 등의 한직을 지냈다. 그러나 부귀영화에 뜻을 두지 않고 일생을 자기 수양에 힘쓰며 형 임성주의 학풍을 이어 주기설을 확립했다. 문집인 『운호집』6권 3책이 전하고 있다. 이영춘『임윤지당- 국역 윤지당 유고』해안 1998 33p~38p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그 역할을 감당한 사람은 둘째 오빠 임성주였다. 그는 윤지당에게 여성의 금기 사항이었던 성리학이란 학문에 눈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윤지당이라는 호도 직접 지어주었다. 윤지당은 동양의 이상적 여성상인 중국 고대 문왕의 어머니 태임과 문왕의 부인 태사의 친정을 뜻하는데 주희의 윤신지라는 말에서 따왔다.
열아홉 살 때 한 살 아래인 원주 선비 신광유에게 시집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녀는 사당에 처음 배열할 때 하녀의 시중을 물리치고 손수 제기를 받들어 모시는 등 모든 행위가 ‘법도에 맞아’ 시댁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8년만인 1747년에 신광유가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끝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난산 끝에 낳은 아이마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죽어버려 자식 없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따라서 남편이나 자식의 벼슬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외명부의 직첩도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와병 중인 시어머니 뿐 아니라 죽은 남편이 입양된 백부 신계 쪽의 가족까지 모시면서 시집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그도 179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문집 ‘윤지당 문고’가 발간되면서 학문적 업적으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윤지당 그가 금단의 영역인 성리학에 심취해 발군의 노력을 기울여 여성 초유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설명한 집안 가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집안 대대로 성리학의 도를 실현하는 일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고 깨끗하고 청렴하게 살았던 가풍은 어릴 적부터 윤지당의 정신과 행동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 임적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집안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크게 일소시켜 윤지당을 아끼는 형제들과 수월하게 학문을 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일찍 잃고 후사 없이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도 당시 여성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과 비교하면 비극이라 하겠으나 그만큼 학문에 몰두할 여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지당의 사상형성 배경
임윤지당은 조선조 경종1년에서 영조를 거쳐 정조 17년까지 조선조 후기를 살았던 여성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윤지당이 살았던 영정조 시대에는 실학의 시대라는 이름을 얻고 있지만 사실상 성리학의 시대중심에 서 있었다. 따라서 여성들에 대한 규제가 보다 보수화되고 강화된 시대였다. 이 시대의 여성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비 형식적인 교육으로 그 내용또한 유교정신에 입각한 부덕함양에만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윤지당은 오라비이자 학문적 스승인 녹문으로부터 직접 당시 여성의 신분으로서는 금기시 되던 유교 경전돠 역사책을 학습했다. 윤지당은 어릴 때부터 남자형제들과 함께 경전과 역사서 들을 강론하며 성장했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형제들을 감복시킨 적이 많았다. 유사에 의하면 ‘형제들이 모여 앉아 경사의리나 고금인물의 치란득실에 대해 논함에 있어 그의 한마디로써 시비를 결단하여 여러 오빠들이 그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는데 이러한 토론들이 후일 윤지당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윤지당의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성조의 학문이 조선 성리학의 어느 계통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윤지당의 학문은 이이를 종조로 하는 기호학파 성리학의 학통속에 있는데 이는 ‘윤지당 유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