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 정율성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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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항일운동가 정율성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우리는 수업 시간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면 언제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 그리고 김구선생도 계시고, 이동휘선생, 김원봉선생등 익숙치 않은 분들이 계실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든 익숙치 않든 모든 운동가분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독립을 한 이후에 이념간의 분쟁에 휩싸여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독립운동가분들을 망각 해왔고, 그래서 이 분들에 대해서는 자연히 평가가 절하되고, 심지어는 그 분들의 독립운동업적까지 왜곡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잊혀져 있던 여러 사회주의성향의 독립운동가분들 중에서 정율성을 소개하고, 그 분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출신과 성장
정률성은 1914년 음력 7월7일 광주시 양림동에서 4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이는 부친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첫째 형인 정효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고, 둘째 형인 정충룡은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었다. 셋째 형인 정의은은 의열단에 가입하여 간부학교의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잡입하여 활동하였다. 정율성도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친가와 외가 양쪽의 후원을 받으며, 훌륭하게 성장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 그는 집안의 노력 하에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당시 그는 학교를 다니며 탁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문예백일장의 장원도 하며 촉망받는 소년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공부나 운동보다는 노래를 배워 부르고, 만돌린 같은 악기를 만지기 열중했고, 이로 인해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어린 정률성을 보고, 우리나라에 군가가 없다는 한탄을 들려주며, 당시의 정률성은 작곡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때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률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후에 그는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그의 셋째형이 함께 중국땅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셋째 형이 고국에서 비밀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때, 그는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해서 그의 길고 긴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중국으로 이주와 활동
당시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에, 우리나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때 정률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상해로 향했다. 그리고 간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상해에서 남경까지 또 기차를 이용해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부학교 제2기생으로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정률성은 그 곳에서 모든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가 없었고, 덕분에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동시에 파아노공부와 성악공부에 열중했다.
특히 상해에는 레닌그라드의 유명한 음악가인 소련인 끄릴노와 교수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매주 한번씩 상해로 나와 그 교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또한 그는 끄릴노와 교수에게서 이론만 배운 것이 아니라 성악도 배우고 또 그 교수를 통해 명곡을 두루 접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열의가 너무나 대단하여, 상해일대의 독립지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끄릴노와 교수는 “만일 이탈리아에 가서 깊이 연구한다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오”라는 격찬을 했다. 그는 1년 동안 참으로 열성적으로 음악공부에 열중했고, 후에 남경의 문예사와 상해의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해 있으면서 항일단체에서 아리랑 등을 부르기도 하고 혁명가곡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심한 경제난으로 상해를 오갈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끄릴노와 교수의 사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자습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파리에서 음악공부를 한 중국인 신성해를 만나서 또 다른 지도를 받았다. 1937년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남경을 위협하였다. 정률성은 이때 중국 팔로군의 근거지인 연안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열아홉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의 음악활동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후 그는 노신예술학원에서 다시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에 그는 이곳에서 김산을 만나서 친분을 쌓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률성은 노신예술대학원에 다니면서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연안송을 작곡하였다. 그는 당시 “혁명의 성지” 연안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어, 중국인 여학생인 막야에게 시를 부탁하고 자신이 곡을 붙여 연안송을 만들어냈다. 당시 연안송은 혁명의 도시 연안의 웅장함과 항일, 연안의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정률성은 척박하고 열악한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연안을 동경과 서정이 가득한 낭만의 도시로 묘사했다. 이 연안송은 당시 한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혁명의 노래였다.
장엄하고 웅장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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