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회화예술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미술의 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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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대 회화예술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미술의 부흥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명나라 말기에 동북 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세력을 통합하여 후금이라 국호를 정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만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만주를 장악한 이후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명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그 당시 명나라의 왕권이 약해지면서 황건적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여진족의 금나라가 명나라 장수들을 이용하여 농민을 제압하고 중국을 직접 지배하게 되면서 청나라가 시작되었다.
회화
청나라 대표적인 화가들은 명나라가 망하자 원말 4대가들의 정심을 이어 받아 초야에 묻혀 살면서 이민족 통치의 반항의식을 표현하는 화풍을 이룩하였다. 청나라 초기에는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을 배경으로 남종문인화 전성기였다. 남종화풍의 그림을 그렸지만 정통성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착상과 구도, 대담한 필치로 독특한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사왕오운(四王吳)
오파의 정통적 남종화를 이어받아 청조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청나라 초기의 6거장에 대한 약칭이다.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원기(王原祁)·왕휘(王)를 4왕(四王)이라 하고, 오역(吳歷)·운수평(壽平:南田)을 오운(吳)이라 칭하여, ‘청초(淸初)의 6대가’라고도 하는데 결속력이 강하였다. 4왕과 오역은 산수(山水), 운수평은 화조화(花鳥畵)를 전문으로 하였다.
왕원기가 왕시민의 손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 사이에는 혈연관계는 없고, 화법에 연관이 조금 보일 뿐이며, 오파(吳派)의 정통적 남종화(南宗畵)를 이어받아 청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청나라 초기의 6거장에 대한 약칭에 지나지 않는다. 왕시민 ·왕감과 그 밖의 두 왕및 오운 사이에는 시대적인 격차가 있고, 4왕과 오역은 산수, 운수평은 화조화를 전문으로 하였다. 오운을 제외한 사왕은 명나라 말기의 동기창(董其昌)에 의하여 확립된 전형주의(典型主義)를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확고한 것으로 정립시켜 청조의 남종화풍을 하나의 틀로 굳히는 원동력이 되었다. 4왕 사이에는 두드러진 개성미는 없고, 건실한 묘법과 파탄 없는 구도를 장기로 하여, 시취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 운수평에 의한 사생적 몰골화조화(寫生的沒骨花鳥畵)가 청조 화조화를 주도하고, 오역계에서 청조 남화로서는 드물게 개성적인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이 특이하다.
왕시민(王時敏 Wang Shi Min, 1592 ~ 1680)
왕시민은 강소성(江蘇省) 태창(太倉)사람이다. 자는 손지(遜之), 호는 연객(煙客), 서려노인(西廬老人)이며 만년에는 서전주인(西田主人), 귀촌노농(歸村老農)이라 하였다. 조부 왕석작(王錫爵)은 만력 연간에 관직이 상국(相國 이부상서)에까지 이르렀으며 부친 왕형(王衡)은 한림편수(翰林編修)를 지냈다. 왕석작은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겨하여 동기창(董其昌, 1555-1636)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9)를 지형산으로 초청하였는데 왕형(王衡)은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왕시민 역시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서화를 배워 탄탄한 기초를 닦았다. 만력 42년(1614) 왕시민은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상보승 벼슬을 시작으로 관직이 태상사소경(太常寺少卿)에 이르러, 옛 사람들이 그를 “왕봉상(王奉常)”이라고 불렀다.
49세 때 민남지역으로 파견되어 일하다 심한 과로로, 남경에 돌아온 후 학질에 걸리는데 그후 관직을 그만두고 태창 교외의 서전(西田, 명대 황실에서 왕시민의 조부 왕석작에서 하사한 땅)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예술 창작에 전념하여 많은 사(詞)와 서화 작품을 남겼다.
왕시민의 집안은 역대의 명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고서화를 감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천계(天啓) 4년(1624) 상보경(尙寶卿)으로 승진하여 수도에 장기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웃인 정계백(程季白)이 소장한 왕유(王維)의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를 빌려 보게 된다. 또, 숭정(崇禎) 5년(1632)경에는 일찌기 동기창이 소장했었던 왕유의 작품 ”설계도(雪溪圖) ” 역시 그의 소유가 된다. “사왕(四王)”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어떤 명가의 필법을 방하여 그린다고 제목을 붙이고는 했는데 대략 그 생각과 정신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왕시민 자신이 본 것과 자신의 집에 소장한 명화에 의거하여 다시 송과 원대의 각 화가들의 구도와 필묵, 채색 방법을 자유롭게 운용하여 당대 왕유 화풍의 옛스럽고 고상한 맑은 기운을 표현해냈다.
왕시민은 소위 사왕파의 우두머리로 동기창의 제자였으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림은 모고에서 시작하여 황공망의 화법에 심취하였으며 제자들을 받아들여 누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왕시민,왕감, 왕휘, 왕원기로 대표되는 4왕화파는 동기창을 직접 계승한 정통 문인화파로 모고를 중시하여, 동원 거연 및 원4대가의 화풍을 따랐다. 필묵의 의취와 형식기법을 연구하여 문인화의 평담, 청아한 정취를 얻고자 하였지만, 사법자연 내용의 표현, 정서의 표현을 소홀히 하여 참신함이 부족하였다. 황실의 적극적 지지로 인해 점차 "원체"산수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고궁박물원 단국강)왕시민은 청대의 정통파 화풍을 성립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집안에 수장되어 내려오던 많은 서화를 접하여 그림을 익혔고, 조부의 친구였던 동기창에게서 예술적 감화를 받았으며, 양식 면에서는 특히 원의 황공망을 따랐다.이 작품은 예찬의 작품을 방한 것으로 이전의 대가를 따라 배운다는 정통파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