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문학에서의 근대성 연구 소설의 탄생과 풍자문학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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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세기 영문학에서의 근대성 연구 소설의 탄생과 풍자문학의 관련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우리는 우리를 설명해주는 말을 소망(素望)한다. 급조되어 조악하더라도 우리들 눈앞에서 부풀어 오르는 현상들을 가라앉히는 논리들을 기대한다. 그것을 빌어왔건 스스로 생산해냈건 간에 그를 통해 세계현상에 대한 설명과 이해라는 기본적인 어휘틀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국 지식 사회가 담론 상호간의 긴밀한 학문적 관계형식을 구성하기보다 서양의 지적 보폭을 흉내내거나 유학파의 선동에 우리를 설명하는 자생적 이론의 정신을 망각하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자성의 요구에서인지 최근 여러 계간지들이 지식 사회를 몇 년간 장악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거품을 벗겨내고 모더니즘 재조명의 분위기를 조성해가고 있다. 한국사회엔 아직 모더니즘적 비판 정신으로 포착될만한 대상들이 아직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성 요소에 대한 기초 반성은 그간 복잡하게 엉켜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못하던 사회 이론들에 대해 경쾌한 리듬을 되찾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회합에 되돌아서 질문해본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한국 지식 사회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에 대해 줄기찬 연구가 있었다. 대상을 상실한 채 폭발하는 소비사회의 기호적 난혼과 그의 가상의 세계에 탐닉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광기어린 진단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분명히 우리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사건과 문화 현상들을 설명하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중심의 해체와 타자성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서양인들에겐 타자일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을 설명하는 방법론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서구 중심의 정신,역사,발전의 논리를 반성하자는 것이 아니었나. 이론을 위한 이론이라 비아냥거릴 수 없는 나름대로 성실한 지적 탐구였던 것이다. 문제는 모던도 포스트모던도 아닌 것 같다. 그들 모두 우리들에겐 소중한 담론들이다. 유행의 본질은 언제나 거품이기 마련.
그것을 세삼스레 지적하는 것은 무용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관용(慣用)적인 자기 비판은 그 자체가 이미 반동적이다. 모던도 포스트모던도 지식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다른 지향성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후에 논할 성질이다. 선결 문제는 서로 극렬하게 상충하더라도 각 담론들의 적소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조화와 갈등에 대한 내적 반성 후 양자간의 변증법적 지양을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 자신의 정신적 진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변증법적 양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모던 이론들은 경제 사회학 위주의 단일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예술과 문화에서 모던이라면 우습게도 지금의 포스트모던의 논리와 닿아있다. 때문에 예술과 문화의 범주가 이론의 틀 안에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포스트모던 담론의 지대한 업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유지하면서 문학적인 모던 담론의 주제를 설정하려 한다면 미학적 진보 사관을 논한 루카치를 비롯한 맑시즘 미학이나 문학 사회학이 알맞을 듯 싶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재론이 다시 논쟁의 구태를 야기시킬 위험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면 가능한한 다른 문학적 맥락에서 모던의 주제를 이끌어 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우리들에게 예전의 계급 갈등구도로 찌들지 않은 상상력이 허락된다면 18세기와 소설의 발생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문학 사회학의 주요 연구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우리의 관심 속에서도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하버마스의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의 부문과 소설의 탄생 그리고 그 배경이 되었던 신문과 여론 층의 형성을 관계 맺으려한 것이 있다.
각자의 연구 대상이 중복되는 것은 사실이나 철학과 사회학으로 예술의 내적 논리를 상실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이론이 아무리 포스트모던과의 담론 속에서 이성의 영역을 보존하려는 치열한 연구의 결과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론에 억지로 갖다 댈 수 있는 성격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금은 예술이 사회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과잉 결정론의 시대가 아니다. 관계의 형식은 내부의 부정적 계기를 통해서 비롯되어야한다. 사회학적 관심이 맹목적인 예술성을 비판하는 자리에서는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겠지만 그보다 예술 내부의 부정적 계기를 발견하여 비예술의 장르와 범주와 제도와 체계의 종합으로 나가는 것이 순리일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일별하는 것으로 기초작업을 꾸리기로 한다.
1. 이성의 시대 속의 반이성
중세 봉건 질서의 붕괴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그 중 하나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회적 변화의 총체성을 망각한 편엽한 이론적 사유일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신고전주의가 단지 신흥 중산 계급을 견제하고자 하는 귀족지향적 문예 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을 것인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 중산 계급의 성격을 초기의 변혁적 성격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보수화 되었다는 급작스러운 변화의 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충실한 것인지를 물을 수 있다. 이런 주장들의 일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돌이켜보면 너무 단순화시켜 요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불가피한 환원의 변명이 되어주었던 이념적 지향성이 사라진 이 때에 색다른 접근을 해보도록 하자. 무엇보다 신고전주의에 대한 접근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 예를 들어 영국 낭만주의자들의 주장들처럼 고전주의의 주장과 이념이 구체제 옹호적인 반동적 성격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우리들이 당시 영국의 사회를 배경으로 모더니티
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무역로와 과학의 발달에 따른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물론 발견 초기의 강국 스페인은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했었다. 그러나 그 해양 지배권을 영국에게 넘겨주게되자 영국을 지나면 지구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미신적 세계관도 따라서 붕괴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로마보다 더욱 넓은 영토에 대한 정복욕으로 전 유럽을 채웠다. 그 활발한 무역의 결과 동방에서 수입되어온 중국 비단과 일본 자기와 수공예품의 우아함은 그런 유럽 귀족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여왕부터 기독교적 상징과 문양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이미지들이 새겨진 옷을 입기를 즐겨했던 그들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기존의 종교적 가치로 이해될 수 없는 패션 그리고 taste, 취향의 문제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번영의 모습으로만 탈중세의 유럽사회를 전부 묘사해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중세 말기 빛의 슬픈 그림자로서 페스트를 기억해야 한다. 중세는 페스트의 창궐로 그 기반이 흔들리다가 페스트의 소멸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 페스트는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감염된 이탈리아의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나 병원균의 정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던 유럽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의 분노라고 여길 뿐이었다. 1350년 말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이 병에 걸려 죽었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이러한 사회적 정신적 공포 속에서 그 존재의미를 상실했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미 미쳐있었고 종교는 그러한 공포를 조장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속죄양들을 찾고 있었다. 유럽 문화와는 이질적으로 살아오던 유대인들이 가장 만만한 대상이었다. 페스트가 발휘했던 죽음의 공포는 그간의 어떤 전쟁의 공황보다 더했으며 모든 가치,의미,질서의 붕괴를 상징했다. 그러나 페스트는 막대한 인명을 손실해가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했다. 페스트의 치료는 결코 속죄양의 희생이라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병원(病源)을 규명하고 환자를 격리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1666년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고 페스트에 황폐화된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신기하게도 이 화재 이후에 영국에서 페스트는 점점 소멸되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