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의 기원제 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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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철학의 기원제 자백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한 기원전 770년경부터, 403년까지를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이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이와 같은 분류기준은 춘추라는 역사서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는 힘이 약해지는데 천자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서서히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한다. 결국 주나라 초기의 1천 여국이나 되던 제후국은 10여 개국으로 정돈되는데,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 라 한다. 기원전 453년 진(晋)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춘추시대는 패자들이 힘이 약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였으나, 전국시대는 이런 생각이 없어지고 오직 힘에 의해서만 대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었다. 이 같은 힘의 논리에 의해 전국칠웅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혼란한 시기의 사상으로서의 제자백가의 발생은 당시의 시대정황을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실용적인 조치로서의 제자백가를 주장하고 있다.
2) 사회적 배경
- 그 이전까지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고, 개인적인 저서 또한 별로 없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면서 그 때까지 간부(官府)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로 인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실현코자 하는 강력한 사회적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다. 또한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각국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능력 있는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게다가 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강력하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기 쉬워 다양한 사상의 발달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각 파의 학설이 쉽게 용인되었으며, 또 사실상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이 도리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제자백가의 분류
1. 사마담(司馬談) 의 제자백가론
역사가들 중에서 제자백가의 분류를 맨 처음 시도한 인물은 사마천(司馬遷)의 부친 사마담(司馬談 : ∼B.C 110)이다. 사마천이《사기(史記)》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친이 쓴 육가(六家)의 요지를 인용한 것을 보면, 사마담이 어떻게 제자백가를 분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마담은 크게 음양가(陰陽家)·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도덕가(道德家)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 첫째로, 음양가(陰陽家)는 우주론자의 일파로서, 음(陰)과 양(陽)이라는 우주의 양대 원리가 화합과 상호작용에 의하며 만물이 생성된다고 믿는 유파이다. 사마담은 음양가를 비판하기를, 너무나 길흉의 조짐을 중시하고, 꺼리는 바가 많으며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음양가들이 배정한 4계절의 순서는 가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둘째로 공자(孔子)가 창시한 유가(儒家)는, 사마담이 보기에 너무 넓게 탐구하여 요점을 잘 파악하지 못하며, 힘은 많이 들이지만 그만큼의 공은 얻지 못하는 학파이다.
그러나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예절을 정하고 부부장유(夫婦長幼)의 차별을 구별해놓은 점은 높이 샀다. 셋째, 묵가(墨家)의 경우, 사람들이 따르기 힘들 정도로 너무도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므로 그대로 다 따라갈 수 없는 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산을 중시하고 절용(節用)을 실천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도덕·인륜보다는 보다 확고한 법전(法典)에 기반을 두어 국가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가(法家)는 인간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여 온정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장점은 군신상하(君臣上下)의 명분을 바로잡아 둔 데에 있다 할 수 있다. 다섯 번째로 명(名)과 실(實)의 구분과 그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명가(名家)는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명칭[名]의 속박을 받게끔 만들고 진실성을 잃게 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명칭과 사실의 관계를 확정짓고 논리성을 따졌다는 것까지 바꿔 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의 도덕가(道德家)는 도가(道家)를 지칭하는 것으로, 무(無)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형이상학과 사회철학에 관심을 기울인 쪽이다. 그들이 말하는 무(無)란 곧 도(道)를 지칭하며, 이 도(道)가 각 개체에 내재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을 한군데로 전념케 하고 자연(自然)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다. 그들의 방법은 음양가에 의한 천시운행(天時運行)의 규율을 장악하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며,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흡수하고, 시간과 더불어 움직이고 사물에 따라 변화한다. 상규(常規)를 정립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마땅하지 않는 데가 없다. 주지(主旨)는 간단하여 시행키 쉬우며, 힘은 덜 들이면서 얻는 공은 오히려 크다. 유가는 그렇지 않아서, 군주를 천하의 의표(儀表)로 생각하고, 군주가 위에서 창도하면 신하는 아래에서 부화(附和)할 뿐이며 군주가 앞서 가면 신하는 뒤따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군주는 피로하지만 신하는 편안하다. 그러므로 도가는 대도(大道)의 요지를 주장함에 있어 먼저 과도한 선망을 제거하고 비뚤게 사용되는 총명을 배척한다. 만일 이러한 원칙을 버리고 단지 자신의 재능만을 믿는다면, 많은 정신과 기력을 허비하게 된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혼란스러운데 천지와 같이 장구(長久)하기를 바라는 것은 좀처럼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논평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마담은 다른 학파들에 대해서는 장점과 함께 단점도 일일이 지적했지만 이 도덕가만은 예외로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사마담 자신이 도가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2. 유흠(劉歆) 의 제자백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