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청나라1

 1  중국의 이해 청나라1-1
 2  중국의 이해 청나라1-2
 3  중국의 이해 청나라1-3
 4  중국의 이해 청나라1-4
 5  중국의 이해 청나라1-5
 6  중국의 이해 청나라1-6
 7  중국의 이해 청나라1-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중국의 이해 청나라1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만주인은 수렵 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 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 노왕(魯王) 당왕(唐王) 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삼번(三藩)이었으며, 수 년에 걸친 삼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 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문화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강희제(康熙帝)는 반만(反滿)사상을 억압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왕조에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적인 관학(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漢文化)에 친숙해졌으나, 명왕조 말 이래의 학자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 야(野)에 있으면서 반만적인 민족의식이나 정치관을 가득 담은 《일지록(日知錄)》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을 저술하였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이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文字의 獄, 禁書), 그로 인하여 반만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고염무에게서 시작되는 고전의 실증적비판적 연구는, 고전이 지녔던 격렬한 경세(經世)의 염을 잃고 학술의 주류가 되었다.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전대흔(錢大昕)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고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自珍)위원(魏源)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장즈둥의 《권학편(勸學篇)》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청왕조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옌푸[嚴復] 등은 유럽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기반에 지탱된 쑨원[孫文]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시야에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고취했는데, 그 사상이 민족민권(民權)민생(民生)으로 집약되는 3민주의(三民主義)였다. 그 내용은 다소 유동적인 것이지만 청왕조 말기 제계급의 동향과 위기의식을 가장 심각하고 포괄적으로 반영한 사상이 되었다. 청대의 문학은 원(元)명(明)에 이어 희곡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聊齋志異)》 《부생육기(浮生六記)》 외에 《유림외사(儒林外史)》 《홍루몽(紅樓夢)》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또 청나라 말에는 임서(林) 등을 통하여 유럽의 근대소설이 소개되어, 계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노잔유기(老殘遊記)》 《20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사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