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사 선종과 사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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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역사와 문화사 선종과 사회세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회변동의 요인들에 있어서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상은 사회 구성원들의 움직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그에 따라 신라 말 ~ 고려 초의 사회가 변화되어가는 소용돌이의 중심축은 하위계층에 속하여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핍박받던 백성들 사이에 퍼진 선종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종은 불교의 한 종파로써 신라 말 사회의 귀족들 사이에서 교리 중심의 일원화되는 성격을 지닌 교종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는 문자와 언어에 의존한 탁상공론적인 교종보다 실질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이 크게 퍼져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사회구성원들의 사상에 따라 그 당시에 상황들을 사회세력의 변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보자.
모든 것을 서술하기에 앞서 신라 말의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신라 말, 후대에 왕위를 이어 나갈 사람을 정하지 못한 혜공왕의 죽음이다.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을 위한 귀족간의 권력싸움이 치열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함께 귀족들의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음을 짐작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왕권이 점점 약화되자 지방 세력인 호족이 등장하여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게 된다.
2. 고려 이전의 노예제 사회
재상가에는 녹이 끊이지 않으며, 노예가 3천이고 이에 상당하는 수의 갑병(군인)과 소, 말, 돼지가 있었다.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길러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꾸어서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동이열전 신라
노동력이 3천이라는 것은 친족공동체의 숫자가 그 정도 단위였다는 증거이고, 일반인을 노복으로 활용한 집단 인신지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조세와 역과 공납을 납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고려 이전의 사회가 곧 노예제 사회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사회공동체가 분화되어 진골이었던 계급이 득난으로 떨어지는 등 계급구조가 변화하였다. 아래의 사료는 신라 후기의 심한 족적 강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신라하대 족적 강등
성주산파(선종 9산의 하나)를 처음 연 낭혜(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그 8대조가 된다. 조부 주천(周川)은 품(品)이 진골이고 위(位)가 한찬(韓粲)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을 지냈음은 집마다 아는 바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이다. 족(族)은 진골에서 한 등급이 떨어지니 이른바 득난(得難)이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첫째가 성이진골(聖而眞骨)이고 둘째가 득난(得難)이다.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니, 《문부(文賦)》에도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惑求易而得難]"고 한 대목이 있다. 6두품부터는 숫자가 큰 신분일수록 귀한데, 이는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