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대한자강회월보,대한유학생학보,경향신문 등의 신문이나 기관지 및 西友 등 학회지에 실린 가사를 뜻한다.
개화가사가 가장 많이 실린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다. 대한매일신보 제2면 하단부 ‘社會燈’ 란에 1908년 1월 중순부터 1909년 11월 중순까지 매호에 빠짐없이 개화가사
대한 인식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화기의 역사임무와 시대 상황의 대응과 수용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소설장르보다 시가장르 쪽이었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의 창작계층에 관한 연구는 개화기의 의식사, 사상사의 정립과 체계를 위해서도 선결되어야 할
학부교과서 편집문제, 의무교육실 시, 사범학교 설립, 사립학교 연락건, 조혼금지, 부동산 매매시 증명서 첨부, 교육기관 증설 및 시설확대, 악질적인 봉건주의 폐습 일소, 색의(色衣)를 입고 단발(斷髮)을 실천 할 것 등이었다. 또한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하여 식산흥업(殖産興業)의 필요성,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지도되어 개화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 사람들이 바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과 같은 서울양반 가문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외에 위의 선각자들 의 지도는 물론, 청으로의 사행을 통해 서구 근대문물에 대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그해 12월 조선 통감부를 설치하여 지배체제를 강화하였으며, 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본격적으로 우리의 국권을 탈취하려 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민족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애국계몽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