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후기낭만주의 : 자기표현의 음악으로
프랑스혁명은 유럽사회에 커다란 새 물결을 흘려보냈다. 혁명과 함께 파생한 낙천주의경향은 얼마 안 가서 환멸에 떨어지게 되고, 이어 혁명세력에 의한 공포정치의 시대가 다가온다. 그러나 공포정치 때문에 유럽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비단 대 학살에 의한 인
Ⅰ. 서론
비엔나 출신의 작곡가로, 비엔나 왕실 예배당의 소년 가수 훈련 학교의 학생으로서 음악적 훈련을 쌓았다. 이곳에서 그는 바이올린 연주법을 습득하고 이론을 배웠으며, 노래 연습도 하였다. 변성기가 되면서 그는 이 학교를 떠나 약 3년간 국민 학교에서 재직하였다. 그 후 그는 낭만주의적
노래를 구사해야 할 때, 여타 시인들의 가을 노래를 물리치고 단연 선두에 선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유무신론자를 불문하고 가을이 오면 모두 ‘주’를 부르는 목소리를 내놓는 듯한 까닭 역시 릴케의 <가을날>에 있음이 틀림없다. 이는 <가을날>이 후배시인들에 의한 릴케의 영
탄식의 노래>를 작곡하면서 작곡가의 길로 뛰어든다. 그러나 2년간의 작곡 생활은 생활의 어려움과 고립, 우울감을 가져왔고 그는 지휘라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1880년 첫 발을 내딛는다. 1880년 바트할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말러는 1881-1882 년 라이바흐 시립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기고 1883년 초에는
노래』를 발표한 이후 1985년 『가신에게 바치는 제물』, 1986년 『꿈의 왕관을 쓰고』 일련의 시집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한다. 자신이 직접 시를 통해 언급하듯이 현대적이고 실험적 작가정신을 발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나는 우울한 일상사에 염증이 나서 / 예술가의 도시를 추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