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사회는 신입생 환영회 때마다 냉면사발에다 소주를 따라 마시는 벌주식을 치르고 있다. 최근에도 여학생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발주를 마시다가 심장마비로 숨지는가 하면 한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다 맨 밑에 깔린 학생들이 실핏줄이 터져 병원에 실려 간 예도 있다는 것이
4.19와 일련의 사건을 어떠한 위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4.19와 일련의 사건들의 성격 규정은 4.19를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으로, 민중의 부패한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의거로, 민중의 혁명으로 규정(4.19 당시에는 주로 ‘4월 혁명’이라는 표현을
서울역 시위가 있었던 5월 15일 이틀 후, 전두환은 계엄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게 되고, 이에 반발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종결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의 봄도 끝나게 되었다.
④ 6월 민주화 운동
87년 1월 14일, 학생운동을 하다
학생운동쯤으로 알고 있었던 4·19가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제부터 4·19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1 . 4·19혁명의 의의
첫째, 4.19는 실리주의 미만과 가치관의 전도로 인하여 기성 세대에게 무기력과 퇴폐의 낙인이 찍혔던 젊은 세대인 학생들이 오명을 씻고 민주세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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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산, 마산지역의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1979년 9월 4일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의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경북학생협의회'가 '이 어두운 역사의 조타수가 되지 못한다면'이라는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했고(같은 책: 324-5) 10월 15일에는 '부산대학교 민주학생 일동'의 이름으로 '노예의 길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