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漢書)』·『당서(唐書)』·『원사』처럼 예(禮)와 악(樂)을 묶어서 「예악지(禮樂志)」로 하지 않고, 둘을 분리하여 다룸으로써『송사(宋史)』의 체제를 따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 지의 맨 앞에는 편찬자의 총서가 실려 있는데, 「악지」의 제일 앞에는 다음과 같은 총서가 붙어 있다.
宋史)』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지(志)」 전반은 『원사(元史)』의 체계를 따르면서도 「악지」만 이렇게 처리한 것은 음악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을 뿐 아니라, 비록 편찬자는 미상이나 고려 음악의 높은 수준을 특별하게 평가한 편찬자의 안목이 작용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악지 서
宋史)』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지」 전반은 『원사(元史)』의 체계를 따르면서도 「악지」만 이렇게 처리한 것은 음악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을 뿐 아니라, 비록 편찬자는 미상이나 고려 음악의 높은 수준을 특별하게 평가한 편찬자의 안목이 작용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악지」의 제일
宋史)』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지」 전반은 『원사(元史)』의 체계를 따르면서도 「악지」만 이렇게 처리한 것은 음악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을 뿐 아니라, 비록 편찬자는 미상이나 고려 음악의 높은 수준을 특별하게 평가한 편찬자의 안목이 작용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지」 권24의 악1(
一, 들어가는 말
우리에게 ‘濂溪’로 잘 알려진 周敦頤(1017-1073)는 『宋史』「道學傳」에서 도학의 창시자, 송명리학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기실, 그는 북송 때에 지방의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며, 중앙에서 활동하고 인정받던 학자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런 지위를 획득하게 된 까닭은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