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학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었을 정도로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2. 사단칠정 논변과 퇴계ㆍ율곡 성리학의 정립
대부분이 재지 중소지주(在地
성리학의 소양을 쌓은 지식인 계층이었다. 이들은 고려 말 점점 중앙에 진출하여 그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고, 성리학 사상의 실천을 통해 고려 말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운영 시스템, 사회 기강과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이 의문의 시해를 당함으로써 그가 추
논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성리학 이론에 대한 논의가 대폭 강화되어 본격적인 성리학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16세기 초에 해당하는 중종초기에 기묘사림으로 불리는 조광조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사회에 정치적으로 구현하고자 진력하였으나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로
논변의 시작이다. 중국 성리학에서 볼 수 없는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을 놓고 펼쳐진 논쟁적 탐구는 ‘천명도’의 내용 중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기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촉발되었다.
당시에는 천명에 대한 연구는 도덕의 근간 및 인간 생존의 의의에 대한 연구였으며 정지운의 천명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