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 결의에 의해 치러진 5.10선거는 21세 이상의 성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남한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이것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하지만 이미 3.1운동 이후 독립세력이 주창하던, 그리고 해방 이후로도 좌우 정치세력이
빨치산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현상이 총사령관이기 때문에 이현상을 다루면서 자연스레 빨치산 내용이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빨치산은 전국 곳곳, 주로 지리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 이현상이 지도하던 곳은 하동쪽의 지리산이었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되었다. 10월 19일 제주도 파병과 군내 좌익제거인 숙군에 반대하여 여수 주둔 제14연대 병사들이 봉기하였다. 당시 신무기였던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한 반란군은 정부의 진압군이 여순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인근의 지리산,
Ⅰ. 개요
1948년 4월 3일 새벽2시! 어둠을 가르는 한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올려지고 이상한 공기가 제주도 전체에 감돌았다. '탕' 하는 총성은 망국적인 5.10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전 무장 세력에 대한 공격개
빨치산이 왜 발생했으며, 누가 그들의 손에 무기를 들게 했으며, 무엇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항쟁의 마음이 들어섰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단지 농민들이 “국가에 대항하여 반국가적인 행동을 했고, 그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이들을 죽여야 했다”는 변명만이 있을 따름이다. 위정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