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905년 11월 ‘유학생단속규칙’ 당시 청 정부는 쑨원을 비롯한 혁명당파와 일본 유학생들의 혁명의식에 위기감을 느끼고 일본 정부에 중국 출신 유학생의 집회 결사와 언론 자유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불법 유학생 단속 규칙’을 발표한다. 이에 반발한 많은 유학생들
民族主義를 확장시켜 漢ㆍ蠻ㆍ蒙ㆍ回ㆍ藏의 五族을 주체로 하는 “五族共和”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양계초의 중화민족론은 당시 중국 내의 종족을 분류함에 있어서조차도 ‘한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중화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中華族’의 구분
문맥상 반만의 강령은 없지만, 회원이 입회할 때의 선서에는 “駆除韃虜(달로(오랑캐)를 구제한다), 恢復中華(중화를 회복한다), 創立合中政府(합중정부를 창립한다)”라고 하고 있다. 만청정부의 타도와 미국과 유사한 부르조아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民族主義)를 엄중히 경계하며, 민족차별로 인한 갈등의 해소와 민족분리주의에 따른 소요를 불식하는 것이 민족 정책의 핵심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정책으로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한다.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소수민족들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中華革命黨)의 명칭을 국민당으로 개조하였다.
2) 중국공산당 창당
국외의 배경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반봉건제의 타파와 외세의 침략으로 빚어진 반식민지 상태에서의 탈피를 위한 근대화 운동, 민족주의 운의 격동 속에 있던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당시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