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근대 - 중체서용中體西用적 사유
중국은 유가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체서용적 근대화를 꿈꾸지만 비록 물질적 조건이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고 해도, 구조적 부정합성으로 인하여 근대화는 실패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일명 절충주의가 갖는 이른바 문화보수주의라는
제 1차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은 서양 세계의 위력을 몸소 체험.
그러나 계속해서 중화중심적인 사고가 만연했고 사회전반의 나태함이 지속됨.
제 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사회가 변국의 상황임을 인식. 서양의 우수한 기술력을 배워야 한다는 움직임의 확산
양무파의 등장과 中體西用을 바탕으로한
中體西用') 이것을 洋務운동 혹은 '동치중흥'이라고 한다. 증국번 이홍장 등은 청조의 협조 하에 소속군대의 근대화에서 시작하여 군수‧운수‧통신‧광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서양식 기술과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밖에도 각종 학교를 부설하여 외국어 교육과 함께 서양의 근대과학을 교육하
中體西用)이나 동도서기(東道西器)같은 말들은 양자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아보려 한 그들의 고 민을 압축한다. 하지만 신문화 운동기에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전통을 비난했고 자신들을 키운 토양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굳이 행과 첨단이란 말을 빌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에
中體西用的) 개혁론의 의의와 한계』, 國際政治論叢, 2004. p52-53
에서 1861년 7월 함풍제(함풍제,咸豊帝)가 피난길에서 사망하고 만다. 함풍제의 뒤를 이을 황제 동치제(동치제,同治帝)를 보필할 8명의 대신 중 핵심적인 3명을 처형해버린 공친왕(공친왕,恭親王)은 동치제의 어머니인 시타이후(서태후,西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