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途而廢 :半途而廢 ;일을 하다가 중도(中途)에서 그만둠
마고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좋지만 당신의 바둑기량이 매우 높지 않고 독특한 흥취가 있는데 당신과 바둑두면 반드시 마음을 다 쓰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니 이른바 ‘풋내기 바둑으로 즐거움을 삼음’이고 이를 빌려 소일거리를 삼네. 당신
主簿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이 무렵부터 李延平(1093-1163)의 가르침을 받았다. 34세 때 李延平도 죽고, 張南軒(1133-1180)과의 교우가 시작된다. 38세 때 호남 澤州에 家居하고 있던 南軒을 방문하여 그와 강론하고는 南軒의 설에 기울어졌다. 그러나 40세, 靜的․動的을 결합하여 그는
主簿),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적성 현감(積城縣監) 등을 거쳤으며, 1791년에는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는 등, 중인이라는 신분에 굴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主簿)가 되었고, 이어 형조좌랑·호조좌랑·지평·장령 등을 역임했다. 또한 조광조·김안국·기준 등과 도학 소장파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교화 시험을 촉진하는 한편, 중종반정 때 공신이 된 훈구파 76인에 대한 공을 삭제하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 급진적인 정치를 하였다. 그는 당시 사림의 영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