交州道) 강릉도(江陵道) 회양도(淮陽道)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 등으로 호칭되다가 조선 태조때 비로소 강원도라 불렸다.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는 이 지역을 강릉부와 춘천부 관할 지역으로 나누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합쳐 강원도로 하였다. 북한관광요람 2권, 북한관광
交州道, 지금의 영서지역)에 속하게 된다. 원주는 원종 10년(1269)에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 충렬왕 17년(1290)에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가 되고 34년(1308)에 원주목(原州牧)이 되어 중부 지역의 중심도시가 된다. 따라서 고려조 450년 동안은 중부방언이 원주지역어의 중추가 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
交州道)로 개칭했다가 1314년(충숙왕 1) 교주도를 회양도(淮陽道), 1356년(공민왕 5) 강릉도를 강릉삭방도로 다시 개칭한 이후 여러 번 명칭이 바뀌다가 1388년(우왕 14) 강릉도를 삭방도에서 떼어 교주도와 합쳐서 교주강릉도라 하고 수부(首府)를 강릉에 두는 한편 평창군을 편입시켰다. 1391년(공양왕 3)에는
㉠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때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였다는 것.
㉡ 무신정권 초기에 나타난 농민천민의 난 때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과 그 영향.
㉢ 몽고침입 당시 항쟁활동으로서 충주성에서의 관노비와 김윤후의 활약.
㈏인물
㉠견훤-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
Ⅰ. 연구소개
‘인구지리교육’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단순해보였지만 굉장히 어려울 것 같은 과제를 받게 되었다. ‘인구’에 관련된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구 관련된 지리적 요점들에 관해 이번 기회로 많은 고뇌를 했다. 그 결과 궁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