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1405년(태종 5년)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인 궁.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의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
仁政)학설과 윤리(倫理)사상을 더욱 깊이 있게 발전 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는 한평생동안 제(齊)․송(宋)․노(魯)․위(魏) 등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한 나라의 군주는 인의(仁義)의 정치를 시행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유세하였다. 그러므로 [멍커(孟子)]라는 책에서는 제선왕(齊宣王)․양(위
仁政"학설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학설이론을 근거로 "성선설"을 제출하였다. 맹자 시대는 유세가가 활약했던 시대였다. 특히 제나라의 도읍 임치에는 유세가가 많이 모여, 그 성황을 <직하의 학>이라 했다. 맹자도 이 직하(임치)에서 논진을 편 일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을 했
태종 5년(1405) 준공된 창덕궁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은 태조가 짓고 이를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이 배치되어 한양이 설계되었기 때문에 가장 권위가 있었지만 조선조 국왕이 실제 가장 오래 머문 정치 생활공간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과 그에 가까운 창경궁이었다.
조선전
3.창덕궁(昌德宮)의 건물
1)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로 지정되어있는 돈화문(敦化門)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다포(多包)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공포(拱包). 주로 조선 전기부터 많이 썼다.
건물이다. 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