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문서 없는 종이다.” 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유교 가부장주의 아래에서의 여성들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오늘날도 한국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적할 때는 큰 고민 없이 그 원인을 유교 전통으로 돌리곤 한다. 더 나아가서 여성들의 삶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많은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유순한 것은 각기 그 법칙이 있는 것이다. 성인 태사와 성인 문왕의 업적이 서로 달랐던 것은 그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다…서로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즉 부인으로서 태임과 태사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자신의 호와 관
그 후 큰 오빠의 죽음과 형제들 중에 각별했던 오빠 녹문마저 떠나 그녀의 슬픔은 더욱 컸다. 『윤지당유고』속의 몇 개의 제문 중에 오빠 녹문에게 올리는 제문을 보면 그 마음의 상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윤지당은 만년에 독서와 저술에 힘쓰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1. 머릿말
조선시대는 남성(男性)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가 뿌리 깊은 사회였다. 조선왕조 건국이후 여성의 생활여건은 전대에 비해 크게 제약을 받으면서 여성에 대한 가정 내에서의 제한과 함께 사회와 문화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까지 제한되었다. 사실 여성에게 있어 공식적인 교
Ⅰ. 머릿말
흔히 조선조 여성이라고 하면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보다는 억압받고 통제된 존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조선이 유교사회이며, 유교적인 사회윤리가 여성에 대해서 엄격한 규범과 절제를 요구하는 이념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