儺禮)’의 위치 배우들의 놀이만으로 분화된 ‘관나’ 연극의 2개 부서, ‘산희’와 ‘야희’ 영·정조 이후부터는 탈춤극의 시대 풍자극인 소학지희(笑謔之戱)의 발달
가척(노래를 담당), 무척(탈춤을 담당), 우인(배우, 광대) 등과 같은 연희 문화 전문 배우의 등장, 이들
儺禮)에서 차례에 따라 학무, 연화대, 처용무가 출연한 것이다. 여기서는 나례(儺禮)의 진행과 행사 내용에 있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학무, 연화대, 처용무가 별도로 합동해서 춘 대목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전원이 회무할 때 함께 참석하고 한 장소, 한 자리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했기 때문에
儺禮)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剽竊)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
을 고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요,
儺禮나 山臺劇에 광대가 참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증한 다음 근원설화가 유랑광대에 의해 판소리로 이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대를 작자로 본 그의 견해는 <춘향전>의 적층문학적, 민중문학적 성격에도 부합되는 것이므로 이후 많은 학자들에게 수용되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판소리의
, 만수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 학무 등을 들 수 있다.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 설화에 기원을 두는 가면무로서 현존하는 궁중 정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춤이다.
주로 궁중 나례(儺禮)나 중요 연례에 처용 탈을 쓰고 추었던 춤으로 처음에는 검은 도포에 사모(紗帽)를 쓰고 1명이 추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