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이 조선을 도움으로써 조선 재건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 은혜를 끝까지 갚아야 한다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再造之恩 : 이것은 명에 대해 단순히 감사하다거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조선 후기 내내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再造之恩」의 망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廷臣들은 명분론에 사로잡혀 징병을 서두르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은 신중론으로 맞섰다. 왕은 조선의 사정이 명을 구원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의 조정에 알리고, 명의 諸將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조선의 군사가 명을 원조하게 하
再造之恩)’을 베푼 고마운 나라라고 여기며 명나라를 숭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 여진족의 누르하치(努爾哈齊)는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위협했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실
1.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이 갖게 된 명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하고,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 보시오.
1) 명에 대한 인식
명에 대한 인식은 좋고 나쁨, 2가지로 나뉜다. 명에 대한 인식이 나쁜 사람들은 임진왜란 초기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던 명군에게 방화,
광해군의 중립외교
< 요 점 >
광해군이 실행한 중립외교
광해군은 왜 평과 절하되었는가?
*
오늘 이 시간 광해군은 왜 평가절하되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광해군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실행한 중립외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 묘
광해군의 ‘묘’ 이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