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造社’의 대표인물로 중국에서 ‘낭만주의’를 이끈 인물로 평가 받는다면 이상은 한국에서 ‘초현실주의와’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현대에 평가받고 있다. 그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점령된 중국과 한국의 혼란한 시기에 식민 지배를 받으며 피지배국가의 지식인으로서 수모를 받고 수많은 고
創造社를 조직하고, 소설집《沈淪》(신문학 이래 중국에서 가장 먼저 출판한 소설집)을 출판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22년(26세)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북경대학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創造社와는 의견 차이로 탈퇴하였으나, 1930년에는 “左聯”에 가입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創造社·太陽社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룹 및 新月社 등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단평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한편 소비에트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흡수,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좌익작가연맹이 성립되자 지도적 입장에 서서 활약하고, 1931년 만주사
하사(夏社)를 조직하여 초기의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21년 성방오(成倣吾), 욱달부(郁達夫)등과 함께 창조사(創造社)를 조직하고 이듬해 5월 1일에 문학잡지 <창조>를 출판한다.
1923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창조주부(創造周報)>, <洪水>의 편집일을 맡으며, 시집 <별나라(星空)> 등을 내 놓았다.
創造社 및 태양사太陽社 작가들과 혁명문학 논쟁.
1929년(49세)
러시아 비평가 루나차르스키(Lunacharskii, 1875-1933)의 《예술론》, 《문예비평》을 번역 출판. 비평 번역집 《벽하역총壁下譯叢》 및 산문시집 《들풀野草》 출판.
1930(50세)
1월, 풍설봉馮雪峰과 욱달부郁達夫와 공동으로 월간지 『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