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學議』를 꼽는데 실학사상 중에서도 특출한 진보성이 이 책의 생명인 동시에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절실한 소망인 구빈(救貧:나라와 민중의 가난을 구제) 하는 방책이 그의 체험과 지식을 통하여 보다 넓은 시야에서 제시되어 있기에 현대에 있어서도 고전으로만 그치지 않는 실용적인 도서가 아
北學議序」,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 可也. 僕多識我一字, 姑學汝. 恥己之不若人, 而不問勝己, 則是終身自固於固陋, 無術之地也.”
라고 한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연암은 학문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학문에 임하는 태도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인 종채(宗采)
<도강록>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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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北學議)> 서문(序文)에서 연암 박지원은‘내가 이 책(북학의)을 펴보니 나의 ‘일록(日錄)’[열하일기]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어, 마치 같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하도 기뻐서 사흘 동안을 읽었으나 조금도 지루함을 못 느꼈다.’고 술회했다. 이
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779년에는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받아 13년간 규장각 내 외직으로 근무하였고,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의 시폐(時弊)를 시정 할 수 있는 구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