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 - 냉혹한 국제질서의 인식과 그의 편입
누가 뭐래도 삼국전쟁의 최대피해자는 조선이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철저히 한반도를 유린하고 황폐화시켰다. 조선은 200년 된 왕조가 더 이상 체제유지의 힘을 추진하지 못한 채 나약한 문치로만 일관했고, 여기에 어렵게 구축한 중앙집권체
. 들어가는 말
태조는 즉위 직후 무로마치 막부에 승각추를 보내 왜구의 금압, 붙잡혀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동시에 수호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족리의만은 사신을 보내 붙잡혀간 조선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측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족리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즉위 후인 1392년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일시 중지되었던 천도계획은 태조 2년 권중화가 왕실의 태실지를 살피고 돌아와 계룡산 도읍도를 헌상함으로써 논의가 진행되었다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즉위 후인 1392년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일시 중지되었던 천도계획은 태조 2년 권중화가 왕실의 태실지를 살피고 돌아와 계룡산 도읍도를 헌상함으로써 논의가 진행되었다
3.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1582년 45세에 히데요시는 모리씨와의 전투를 하는 도중 노부나가가 부하였던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 에게 변을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것을 혼노사의 정변이라고 한다. 히데요시는 즉각 모리씨와 화의를 맺고 병력을 돌려 야마자키 山崎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