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學)에 대한 대칭으로 ‘한대의 유학(儒學)을 배경으로 한 제반 학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중국문자로 기술된 것은 한학 또는 한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던 것은 이 땅에 한문 내지는 한문화가 옮겨지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한대였고, 또 한나라의 세력은 중국
宋學)이라는 새 유학이 발생한 것도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로 부터 유교로
육조(六朝) 수당(隋唐)의 7백 년 간이 중국 불교의 황금 시대였던 것은 정치와 문화 담당자인 사대부가 문벌 귀족이었던 사실로 인함이 크다. 그들은 관리이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고, 반대로
宋學)을 대성(大成) 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 정이(程燎)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2. 본
宋學)으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 말 안유(安裕: 安珦)가 연경(燕京)에 갔다가 수입해 온 후로 점차로 진흥하여 조선 국가 건설의 지도적 이념이 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원용(援用), 가묘(街廟)의 설립 등으로 점차 민중생활 속에까지 깊이 뿌리를 박으면서 조선사회에 공과
宋學)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中體西用)>사상으로 특징되며 그 뒤 옌푸[嚴復] 등에 의한 서양사상의 본격적인 소개와, 서양유학에 의한 신사상신학문으로 청나라 문화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쑨원의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