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路에 혐오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왕성하게 활약할 수 있던 시기에 또 다시 사화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훈구세력에 이어 외척의 발호를 부르게 된 어린 명종의 몽매함과 정치를 모르는 문정왕후의 섭정 및 이를 기화로 사욕과 보복에 눈이 어두워진 벼슬아치와 외척들의 쟁투의 틈에서,
却說周主郭威, 接到鞏廷美來表, 躊躇一回, 特想出數語, 作爲答覆河東文書。
각설주주곽위 접도공정미래표 주저일회 특상출수어 작위답복하동문서
각설하고 주나라 군주인 곽위는 공정미가 보낸 표를 접하고 1번 주저하다가 특별히 몇 마디 말을 생각해내 하동 문서에 답변했다.
大略說是:湘陰公
1. 序 論
1170년 무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의 해체, 지방의 중소지주 계층의 부상, 민중의 역량과 의식의 성장 등 고려 전기와는 다른 변혁의 양상을 보였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문신을 학살하고, 의종을 폐위한 후 무신정권의 시작을 알렸다. 이규보는 무신의 난이 일
이규보(李奎報)의 생애(生涯)
[1] 이규보(李奎報, 1168~1241)란 누구인가?
① 한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동국(東國)의 시호(詩豪)요 시성(詩聖)으로 평가받음.
② 고려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이 된 무신집정기(武臣執政基)를 살아간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임.
③ 무신의 지배로 인한 국내 정치의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