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祖)에 대해 재평가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우리가 보통 선조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임진왜란 발발에 책임이 있는 무능력한 군주’, ‘서울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임금’, ‘국난 극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성웅 이순신에 대해 시기하는 임금’ 등의 부정적인 것들뿐이
宣祖·光海君 시절에는 당쟁으로 인한 정치인들의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어 국정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여기에 임진왜란의 피해가 겹쳐 민생고는 최악의 상태였다. 또한 상류층에 있어서는 사상·출신·향별로 인한 분열이 생겨 東人과 西人으로 갈리게 되어 마침내 南人·北人·大北·小北과 같은 당파를
宣祖大王) 시절,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김생(金生)이라고 하는 소년 선비가 있었는데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풍채가 절륜하였다. 글을 잘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잘하였으니, 참으로 세간에 있어서의 한 기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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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겨우 15세에 진사 제일과(第一科)에 오르니, 이름이 장
宣祖, 재위 1567~1608)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의 문신인 조탁(曺倬, 1552~1621)을 말한다. 大而는 그의 字이고, 二養堂齋는 그의 號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하였으며, 이후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