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의 성립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三韓을 통합하고 비로소 東南海道部署使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慶尙晋安東道, 慶尙州道, 慶尙道 등으로 각각 고쳤으나 그 개칭의 연대는 미상이다”고 하였다. 그 개칭의 연대에 관해서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이
尙州) 관성군(管城郡)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옥천지역은 고시산군(古尸山郡)으로 불렸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산성(山城)과 고분(古墳)을 대표적 자료로 들 수 있다. 비록 정상적으로 발굴 조사된 자료가 없어서 단정짓기에는 무리지만 옥천향토전시관에 수집된 자료에서 보면 5세기말
)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聞慶市 加恩邑)에서 태어났다.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尙州)를 발판으로 이후 죽령(竹嶺) 죽령(竹嶺)은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동쪽 사면은 내성강(乃城江)의 지류인 서천(西川)의 상류 계곡으로 통하고, 서쪽 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죽령천(竹嶺川)의 상류 하곡과 이어진다. 비록 험한 고갯길이었으나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