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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후금은 배타적인 국수적인 만주족 국가라는 성격을 탈피 한족과 몽고족을 적극 포용하는 다민족 국가로서 군주 독재하의 관료국가체제를 이끌어 나갔다.
1635년 이듬해 국호를 청淸이라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고치고 심양을 도읍으로 정하여 성경盛京이라 했는데 그가 바로 청 태종이다.
崇德으로 고쳐 심양을 도읍으로 정하여 盛京이라 했는데 그가 바로 청태종이다. 한족 지식인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으며 과거를 실시하여 한족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老滿文을 바탕으로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新滿文을 만들어 그 후 역대에서 사용하였다. 몽고와 서장과의 연락,지배 수단으로
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면서 친일 활동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0세 때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崇德)으로 하고 황제에 등극. 명조의 관료제도를 모방해 내각과 6부를 두고 과거를 실시하는 등 중앙 집권적 다민족 관료국가체제 채택.
- 한인에 대해 회유정책을 펴서 투항한 한인에 대해 관직을 세습시키고 일반인들에게 각종 생활 편의를 제공. 한인 관료인 상가희, 공유덕, 경중명이 투항해 명조
崇德小學校)를 나와 같은해 정주(定洲)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 다시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전학했다.
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신문에 발표하기 시작, 이듬해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3년 시 《1933년 수레바퀴》 등 다수의 작품을 내놓고, 이듬해 숭실중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