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別抄는 원래 崔氏의 2대 집정자 崔瑀가 도적을 막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군대인 夜別抄를 군사가 많아지자 左ㆍ右別抄로 나누고 다시 崔沆 代에 몽골에서 도망쳐 온 자들로 구성된 神義軍이 합쳐 조직된 군대였다. 『高麗史』권81 兵志 1 兵制 元宗 11年 5月.
夜別抄는 高宗 19년에 처음
崔瑀) 등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완성한 경판의 총 판수가 81,240매에 달하며, 84,000가지 중생의 번뇌에 대치하는 84,000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초조대장경이 전란 속에서 타버리고 그것을 다시 판각했다고 해서
崔瑀)는 나라에 도(盜)가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勇士)를 모아서 매일 밤 돌아다니며 횡포를 막게 하고, 이로 인하여 야별초(夜別抄)라고 이름 붙이었는데, 도(盜)가 각 도(道)에 일어남에 별초(別抄)를 나누어 보내서 이를 잡게 하였다. 그 군사가 심히 많아 드디어 나누어서 좌우별초(左右別抄)로 삼았다.
崔瑀)의 서자 승 만종(萬宗)·만전(萬全)이 악승(惡僧)을 모아 식화(殖貨)로써 업(業)을 삼아 금은곡백(穀帛)을 쌓았으며, 그 문도(門徒)들은 각 사원에 분산되어 심한 횡포를 부렸다. 충렬왕(忠烈王) 때는 원조(元朝)의 위압(威壓)이 컸으며 토번승(吐蕃僧:西藏僧)들이 인심을 무혹(誣惑)하였고, 또 라마
崔瑀)시기에 이루어졌는데 공물(貢物)의 납부와 납질(納質)·조군(助軍) 그리고 다루가치 설치 등 ‘6사‘의 부분적인 수용을 조건으로 강화(講話)가 이루어졌다. 이 1차 침략의 강화와 동시에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자는 논의가 본격화 되었고, 본격적인 몽고에 대한 항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