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
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崔鳴吉)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궤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후에 그는 중추원 의장이 되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일본 정부가 주는 백작칭호를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
박제순(朴齊純) -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도장을 찍은 외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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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鳴吉)은 다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