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여명기(黎明期)는 멀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민족의 경우이거나 문학은 시가(詩歌)와 무용과 음악이 한데 어울린 종합적인 원시예술의 형태로 발생하였음을 본다.
한국의 경우도 옛 기록에 나타나는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平壤城)에서 다시 국내성(國內城)으로 퇴진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강성한 힘은 근초고왕대를 이은 근구수왕(近仇首王)대인 377년에 다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침하고, 이어 중국 대륙을 정벌하여 요서(遼西)와 북경지방을 쳐서 요서(遼西), 진평(晋平)의 두 군(郡)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지방까지 백제
城碑)에서 이두식 표기의 흔적이 보임으로써 설총이 이두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남산신성비보다 더 오랜 이두 금석문(金石文)으로는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446))과 은합간(銀合杆(451))이 전해진다. 이러한 이두는 6~7세기경 그 표기법이 고정되고 훈
平壤城)에 도읍하고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일컬었으며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고 그 뒤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또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달리 《제왕운기》에는 환웅이 자신의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간의 모습